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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8-15 11: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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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5 선언」과 관련하여 강조할 것은 국가지도자의 비전에 이어 당시 획기적으로 정책 전환을 결정할 때의 시스템이다. 「8․15 선언」 발표 준비는 대통령의 지시로 1969년 5월 4일 임명된 강상욱 청와대 공보수석비서관 겸 대변인이 주도하였다.


▲ 박정희 대통령 시기 청와대 공보수석비서관을 지냈던 강상욱 장군이 제9대 국회의원선거 서울 제2선거구에 출마했을 당시의 선전벽보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별세 전에 강 수석비서관과 가진 수차의 인터뷰에 의하면, 「8․15 선언」은 크게 보아 1969년 추석 후, 1970년대의 국정 전반 비전을 제시하는 대통령의 1970년 연두교서 준비 지시, 대통령의 1970년 1월 연두교서 발표, 1970년 3월 초 「8․15 선언」 발표 준비 지시를 받은 후 부터 학계와 언론계의 자문을 받으면서 6월 말 청와대 공보수석비서관실의 ‘8․15 경축사’ 연설문 초안 작성 후  대통령에게 보고, 대담한 내용을 포함하라는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7월 말부터 차관급으로 구성된 관계부처 실무회의 검토, 8월 9일 대통령 주재 장관급 정책 결정 회의에서의 검토, 8월 15일 선언 발표로 진행되었는데, 총 소요 기간은 1년 정도 걸렸다.


 강 수석비서관이 「8․15 선언」 발표 준비를 주도하게 된 경위는 대통령의 유연한 남북한 관계 관리 구상에 대한 외무부 등 정부 부처의 소극적 반응에서 비롯되었다.    


1970년 3월 초 박대통령은 강수석비서관에게 “그동안 남북관계를 유연하게 관리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 하는 의견을 외무부 등 정부 관계자들에게 던져 보았으나 모두 시기상조라는 반응이었다“고 하면서 8월 15일에 ”지난 4반세기의 남북한 관계를 회고하고 앞으로 4반세기가 되는 1995년까지 남북한이 서로 평화를 지키면서 어느 체제가 잘 사는지를 정정당당하게 경쟁해 나갈 것을 제시해 보자”는 구상을 발표하는 작업을 지시하였다.  


3월 초부터 청와대 공보수석비서관실 주도로 극비리에 「8․15 선언」 발표를 준비하였으나,  박 대통령이 주재하는 8월 9일 마지막 회의에서는 각 부처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기 위하여 언성을 높이고 갑론을박을 하였다. 


 8월 9일 오전 10시에 대통령 주재로 시작한 대통령 집무실 회의에는 대통령, 최규하 외무장관, 이호 법무장관, 김영선 국토통일원 장관, 김계원 중앙정보부장, 김정렴 비서실장, 신직수 검찰총장, 유근창 국방차관이 참석하여 갑론을박의 토론을 하였다. 참석자들 간의 팽팽한 의견 대립으로 오후가 되어도 결말이 나지 않자 박 대통령은 김정렴 비서실장에게 의견을 다시 모아오라고 지시하였다.


 비서실장실로 옮겨 청와대 비서진, 대검검사, 강국장이 포함되어 계속된 회의에서도 이호 법무부 장관을 비롯한 율사들은 이 정책 전환이 반공법에 저촉된다는 이유로 끝까지 강력히 반대했다. 박 대통령은 오후 늦게 다시 회의를 주재하면서 법무부 율사들이 반대한 취지와 외무부가 건의한 내용을 즉석에서 받아들여 직접 연설문 초안을 수정하였다. 


 강한 리더십으로 국가를 이끌면서 권위적으로 알려졌던 박대통령이 주재하는 회의에서 북한을 대화의 상대자로 인정하고 연설문 초안을 준비한 작업 자체가 구속감이라고 지적한 법무부 율사들과 대통령의 비전과 구상을 구현하기 위하여 열변을 토하였던 강상욱 청와대 대변인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본받아야 할 시스템적인 정책 협의․조정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8․15 선언」과 같은 중대한 대북정책 전환을 고려할 때 자신이 주재하는 정책조정회의에서 먼저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지 않고 관계부처의 의견 개진과 토론을 유도하고 이견(異見)을 수용하여 종합하는 시스템으로 정책을 협의․조정하였다.


다만 박대통령이나 실무 작업을 맡은 강상욱 당시 청와대 공보수석비서관  겸 대변인은 정책 발표의 비밀유지를 위해 국회와 야당의 의견을 초당적으로 수렴하지는 않았다. 


 여기서 국가정책 수립의 전반에 걸쳐 소리 없이 수행된 대통령비서실장의 조정자적 역할과 당시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의 지원 역할도 지적하고 싶다.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 대통령과 정부 각 부처 사이에서, 그리고 경쟁적 입장에 있던 대통령 비서실 내의 각 수석비서관 사이에서 수행한 조정 역할은 중복 보고의 방지는 물론 대통령과 장관, 수석비서관 간의 원활한 대화를 촉진시킴으로써 효율적인 정책 결정을 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중앙정보부는 1969년부터 1974년까지 강인덕 북한국장의 책임 하에 「남북한 경제력 비교」 제하의 남북한 체제경쟁의 중간평가보고서를 발간하여 대통령의 대북정책 전환을 뒷받침하였다. 또한 강인덕 국장은 청와대 공보수석비서관과 관계부처 차관급으로 구성된 실무회의에 참가하였으며 강상욱 대변인의 요청으로 박 대통령에게 보고한 연설문 초안을 1970년 8월 1일 검토하여 경제, 스포츠 등 문화교류, 서신 교류 등 전면적 교류를 포함시킨 수정안을 작성, 제출하는 등 정책 전환 작업에 적극 참가하였다.


 당시는 반공을 국시로 하였기 때문에 정부가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대화를 하는 문제를 논의하였다는 것 자체가 큰 정치적 문제가 되었다. 「8 · 15」선언 후 대북 정책 논의는 정부 내에서 공개적으로 하지 않고 대통령과 중앙정보부를 중심으로 극비리에 이루어졌다.


 일례로 대한적십자사가 적십자회담을 제의하고 이 회담 과정에 비밀접촉을 하여「7 · 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할 때까지 김종필 국무총리를 포함한 정부의 어느 누구와도 협의를 하지 않았다. 국무총리가 관여하게 된 것은 동 성명이 발표된 이후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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