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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분석] 천안문 시위 34주년, 진실 알려지면 中공산당 무너진다! - 천안문사태 34주년, 원천봉쇄하는 중국과 홍콩 - 중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 천안문 사태 - 천안문사태 진실 알려지면 중국 공산당 정권도 붕괴된다!
  • 기사등록 2023-06-04 05: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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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사태 34주년, 원천봉쇄하는 중국과 홍콩]


6월 4일은 중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 중 하나인 천안문(톈안먼) 시위 34주년이다. 중국은 지금 ‘천안문 사태’와 관련된 용어는 물론이고, 기억까지도 철저하게 말살하고 또 봉쇄하고 있다. 중국 본토가 아닌 홍콩에서의 추도행사 역시 완전히 막아버렸다. 중국은 왜 이렇게 천안문 사태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바로 그 천안문 사태에 중국의 본질이 모두 담겨 있기 때문이다.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2일 “홍콩 경찰이 오는 4일 천안문 민주화 시위 34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주말인 3∼4일 경찰관 5천명을 거리에 배치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또한 경찰 소식통을 인용해 “이전까지 천안문 시위 희생자 추모 촛불 집회가 열렸던 빅토리아 파크 주변의 경비가 강화될 것”이라고 전했다.


또 다른 소식통은 “경찰이 대규모 군중의 모임을 막고, 수상한 자에 대한 검문을 포함해 '초기 개입 전략'을 취할 것”이라며 “우리는 (반정부 시위가 발생한) 2019년의 혼란이 반복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고 밝혔다.


홍콩당국이 이렇게 긴장하면서 철저하게 천안문 사태 추모집회를 막으려 하는 것은, 당연히 중국 본토 당국이 철저하게 막기를 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를 계기로 반중국 시위로 번져갈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중국 당국이 1989년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을 유혈 진압하자, 홍콩에서는 이듬해부터 매년 6월 4일 저녁이면 빅토리아 파크에서 시위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촛불 집회가 열렸다. 그러나 지난 2019년 천안문 추모집회를 계기로 반정부 시위가 거세게 벌어지자, 홍콩당국은 이후 추모집회를 불허하면서 철저하게 봉쇄하고 있다.


[중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 천안문 사태]


캐나다 맥매스터대의 송재윤 교수는 ‘대륙의 자유인’이라는 칼럼에서 “1989년 천안문 대학살은 민주의 싹을 자르고 불사르는 전체주의적 인권유린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중국 공산당은 왜 그토록 잔악무도한 대학살을 감행하게 되었을까?


지난 1989년,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민주, 자유, 부패 척결을 외치며 평화롭게 시위를 하면서 ‘베이징의 봄’이 한창 무르익고 있을 때, 중국공산당은 돌연 탱크와 장갑차로 무장한 20만 병력을 투입하게 된다. 그들은 베이징 전역을 에워싸고 포위망을 좁혀 오더니, 결국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무력을 통해 시위 군중을 학살하고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그런데 중국 공산당의 천안문 시위 대응작전은 단순하게 시위 해산에만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다시말해 이전인 1976년 4월에도 천안문에서 시위가 있었는데, 그때는 단 한 명의 사망자도 없이 그저 해산만 했을 뿐이었지만 1989년의 천안문 군사작전은 이와는 완전 딴판이었다.


이와 관련해 송재윤 교수는 “1949년 1월 국공내전 상황에서 중국공산당의 군대가 베이징을 ‘해방’한 후, 그토록 대규모의 병력이 수도를 점령한 사례는 없었다”면서 개혁개방을 외치던 덩샤오핑은 과연 어떤 생각으로 20만 병력의 출동을 명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송재윤 교수에 따르면 천안문 시위 당시 동원된 군병력은 베이징 주위 경기(京畿) 지역 방위 부대 외에도 랴오닝성의 선양(瀋陽), 산둥성의 지난(濟南), 심지어는 베이징에서 천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난징(南京)에서도 대규모의 군부대가 동원되었다.


그렇다면 덩샤오핑은 왜 이렇게 무려 20만명의 병력을 전국 각지에서 동원했을까? ‘천안문 대학살’의 연구자 우런화(吳仁華)에 의하면, 천안문 대학살의 최종 결정자인 당시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덩샤오핑과 중국 공산당의 보수파 핵심이었던 양상쿤(楊尙昆)에겐 두 가지의 더 큰 이유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우선 평화롭게 시위하는 학생들과 학생들을 성원하는 시민들을 진압하는 목적뿐 아니라, 동시에 중국 공산당 내에서의 정변(政變)을 막고, 군대의 병변(兵變)도 막으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 입장에서는 당내에서 덩샤오핑 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정변’을 획책할 수 있는 요주의(要注意) 인물로, 중국공산당 총서기 자오쯔양(趙紫陽) 일파를 지목했다. 실제로 1989년 상황에서 공산당 총서기 자오쯔양이 정권의 구심을 탈환하는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당시 1979년부터 집권했던 덩샤오핑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견지하는 ‘보수파’와 시장주의 자유화를 지향하는 ‘개혁파’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러다가 보수파에 기운 덩샤오핑은 1987년 1월 개혁파의 영수 후야오방(胡耀邦)을 공산당 총서기직에서 파면했고, 이어 후야오방에 이은 개혁파 영수 자오쯔양도 6.4 대학살 이후 가택 연금을 해버렸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덩샤오핑은 공산당 총서기, 국가주석, 국무원 총리의 직책을 모두 아랫사람에게 양보한 채 오직 중앙군사위 주석의 직위만을 견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군권만 장악하고 있다면 나머지 정치세력이야 언제든지 쓸어버릴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렇게 정국이 어지러운 상황에서 덩샤오핑은 천안문 시위를 계기로 군대를 동원해 사실상의 내전을 벌인 것이다. 이를 통해 일거에 정적세력인 개혁파를 쓸어버리고, 또한 군부내의 비우호 세력까지도 숙청하는 기회로 삼았다.


결국 덩샤오핑은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당내 및 군부 반대세력은 물론이고, 중국내 민주화 운동 세력까지 일거에 제거해 버렸다. 이는 인권유린이기도 하거니와 엄청난 정치범죄다.


대학살 닷새 후, 6월 9일 공식 행사에 모습을 드러낸 덩샤오핑은 계엄군의 공로를 치하하며 “인민해방군은 진정 당과 국가를 지키는 철의 장성”이라고 치켜세웠다. 그는 천안문 민주화 운동을 ‘반혁명 폭란(暴亂)’으로 규정했다. 덩샤오핑이 이렇게 ‘폭란’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대학생과 노동자들의 불법 조직이 선제적으로 사회주의를 파괴하는 반혁명운동을 일으켰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덩샤오핑의 이러한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들은 어떠한 무기도 들지 않았으며, 그저 자유와 평화를 요구했을 뿐이다. 당시 천안문 시위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사진이 바로 천안문 광장으로 진입하는 탱크를 맨 몸으로 막아선 한 청년의 모습이다.


32년간 망명객으로 미국에 체류해온 역사·문헌학자 우런화(吳仁華)는 2019년 5월 천안문 대학살 30주년을 맞아 1989년 4월 15일부터 1989년 6월 30일까지 주요 사건을 날짜별로 정리한 643쪽의 ‘64사건 전 과정 실록’을 출판했다.


이 책에는 6월 4일 새벽 6시경 천안문 광장 인근인 류부커우(六部口)에서 3대의 탱크가 황색 매연을 뿜는 독기탄(毒氣彈)을 쏘면서 달려와서 인도 위에서 줄 맞춰 걷고 있는 수천 명 학생의 대오를 들이받아 깔아뭉개고 갔다는 기록도 나온다.


[왜 천안문 사태를 기억해야만 하는가?]


그렇다면 중국과 홍콩의 많은 자유인들은 왜 천안문 사태를 기억하려고 하며, 또 잊지 않으려 하는가? 자유를 원하다가 너무나도 많은 청년들이 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말한다.


“영불유망(永不遺忘, 영원히 잊지 않으리)!”


중국 공산당은 지금도 천안문사태를 상기하는 것 자체를 꺼린다. 천안문 사태가 정당화되면, 중국 공산당의 집권명분 또한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 공산당은 오늘도 탄압과 검열의 고삐를 조이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천안문 대학살을 기억하면서 중국인들의 인식을 꺠워야 하는 이유는, 그를 통해 중국의 민주화 단초를 열 수 있어서다. 또한 꽁꽁 숨겨져 있는 천안문 대학살의 실체를 밝히 드러내기 위함이다.


영국의 비밀 외교문서는 “만일 민간인 희생자가 최소 1만 명에 달한다면, 중국 공산당은 절대로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밝힐 수가 없다”면서 “그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순간, 중국 공산당은 그 자체로 통치의 정당성을 잃고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적었다. 이 외교 문서에 비춰본다면, 천안문 대학살로 인해 숨진 수가 최소 1만명에 달할 것이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지금 중국에서는 포털사이트에서조차 천안문시위는 물론이고, 6월 4일의 기록조차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이렇게 천안문 기억 자체를 완전히 삭제하는 이유는 천안문 사태의 진실이 갖는 폭발성 때문이다.


지난 2021년 11월 중국 공산당이 채택한 제3차 역사결의는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 소련이 해체되고 동유럽이 격변했다"며 "국제사회 반(反)공산주의·반사회주의 적대 세력의 지지와 선동으로 인해 국제적인 큰 기류와 국내의 작은 기류는 1989년 봄에서 여름으로 가는 시기에 우리나라에 엄중한 정치 풍파를 초래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결의는 시위 진압에 대해 "당과 정부는 인민을 의지해 동란에 선명하게 반대하는 것을 기치로 해서 사회주의 국가 정권과 인민의 근본 이익을 수호했다"고 평가했다.


그만큼 중국 역사에 있어서 천안문 사태는 뼈아픈 것이고, 중국 공산당에게는 아킬레스건이다. 이는 천안문 사태의 진실이 알려지면 중국 공산당 체제는 무너질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천안문 대학살을 기억해야 하고, 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데 온기를 불어 넣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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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EDUIN News 대표
    -전 OUR NEWS 대표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정책기획팀장
    -전 대통령실 홍보기획비서관
    -사단법인 한국가정상담연구소 이사장

    -저서: 북한급변사태와 한반도통일, 2012 다시우파다, 선거마케팅, 한국의 정치광고, 국회의원 선거매뉴얼 등 50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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