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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3-04-12 07:5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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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배를 마시는 소크라테스. 자크 루이 다비드의 ‘소크라테스의 죽음’(1787년)이다.


명절 때가 되면 며느리들의 명절 스트레스가 사회적인 큰 문제로 화제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명절이 지나면 이혼하는 사례도 증가한다고 하는데, 금년에는 코로나-19 때문에 이혼을 당할 가정이 많이 줄었을 것이다. 요즘 여성들은 시댁의 “시” 자만 들어도 경기(驚氣)를 할 정도로 피하고 싶은 관계가 되었다. 그러면 과거의 여인들은 가정에서 얼마만큼 정당한 대우를 받았을까?


고대부터 중세 시대까지 세계적으로 악처의 반열에 들었던 여인들이 매우 많다.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에서부터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아,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의롭고 순진한 욥의 아내, 세계 감리교회를 창시한 존 웨슬리의 아내 몰리, 미국 대통령을 지냈던 링컨의 아내 메리, 그리고 강태공의 아내도 세계적인 악처의 명단에 들어 있다.


소크라테스(Socrates)는 중혼을 했기 때문에 여자가 여럿 있었지만 아내 크산티페(Xsanthippe)만이 자식을 낳았다. 소크라테스가 70세 정도에 죽었는데, 그 때 크산티페는 젖먹이 아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30~40세 연하인 것으로 보인다. 젊은 아내는 밤낮으로 수많은 젊은 손님을 접대해야 했고, 가정경제를 꾸려나가기 위해서 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렸을 것이다. 어떤 날 “이렇게 늦은 시간에 남의 집에 찾아오는 무례함이 어디 있느냐”고 소리치면, 소크라테스와 손님들은 민망해서 숨을 죽이곤 했는데, 어느 날에는 세숫대야에 물을 담아 소크라테스의 머리에 물을 붓기도 했다고 한다. 그녀 이름 자체가 악처(Xanthippe)를 뜻할 정도로 소크라테스에게 대단한 악처였다고 한다. 그녀가 죽게 되면 그녀 묘비에 “악처” 라는 문구를 써 넣어 달라고 했던 소크라테스였다.


30살 정도가 더 많은 남편과 살고 있으면서, 아이는 둘이나 있었다. 남편은 직장도 없이 매일 젊은이와 술만 마시고 게다가 가끔 젊은이를 집으로 데려와 술상을 차려달라고 한다. 아이들은 먹을 것도 없어 굶고 있는데 술상을 차려내라는 것보다도 가장의 노릇을 하지 못하는 남편이 섭섭했을 것이다. 매일 술을 마시고 비틀거리는 남편이 예뻐 보일 수 없었을 것이다. 무능하면서 백수인 남편에게 미움보다는 오히려 심한 증오까지 생겼을 것이다. 구정물을 남편에게 부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톨스토이가 34살이던 1862년에 18세의 소피아(1844~1919)를 만나 결혼했다. 무려 16년의 나이 차가 있었다. 소피아는 결혼 전에는 소설을 쓰기도 했고, 결혼 후,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 톨스토이의 많은 작품을 교정도 하면서 끊임없는 출산과 육아로 하루에 5시간 넘게 잠을 잔 적이 없었다고 한다. 사실 톨스토이는 당대에도 유명한 카사노바였는데, 소피아와 결혼하기 전에도 이미 사생아가 있었다. 그런 그가 늙어서 갑자기 모든 재산을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자는 주장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부인은 엄청난 충격을 받고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다고 한다. 1910년 노년기에 톨스토이는 극비리에 유언장을 새로 작성하여, 작품 저작권을 모두 막내딸에게 준다고 유언을 하기도 했다.


이런 비밀 유언장을 발견하게 된 소피아는 크게 부부 싸움을 했고, 이 일로 톨스토이는 82세에 “아내가 나와 집안을 완전히 망치고 있다”는 메모를 남기고 가출하게 된다. 결국 1910년에 “톨스토이 역”이라 하는 당시 “아스토보 역”에서 폐렴으로 사망한다. 톨스토이는 죽으면서 “내 장례식에 저 여자만은 제발 데리고 오지 말아 달라”는 유언까지 했다고 한다.

소피아는 귀족 출신으로 결혼 후 아이를 13명이나 낳았다. 귀족들은 당시 유모를 두어 아이를 길렀는데, 톨스토이가 유모 두는 것을 강하게 거부하여 소피아는 혼자서 아이를 키우면서 톨스토이의 원고 교정까지 담당했기 때문에 늘 잠이 부족했다. 더욱이 톨스토이는 여성편력이 있어 심한 바람둥이였다. 그러한 남편이 80이 넘어 모든 재산을 청산하고 농민으로 살겠다고 고집을 부리니 어느 누가 그를 찬성하겠는가?


욥은 하나님을 잘 믿는 신실한 사람이었다. 하나님도 욥만큼이나 정직하고 순진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라고 칭찬했다. 그래서 욥에게 하나님은 동방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되게 했다. 그런데 그렇게나 잘 살던 욥에게 연속적으로 엄청난 시련이 닥치게 되었다. 많은 노예와 재산이 하루아침에 불태워지거나 죽기도 하고 빼앗기기도 했다. 거기에 그의 10명의 자녀들도 모두 태풍에 쓸려 죽었다. 욥의 몸에는 피부병이 생겨 겨우 목숨만 붙어 있어서 가려움과 통증으로 울부짖고 있었다. 욥의 아내는 이렇게 된 비참한 재앙은 모두 하나님의 허락으로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토록 하나님을 공경했던 남편은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배신당했다고 생각한다. 욥의 아내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외치고는 마침내 욥에게서 떠나 버린다. 이런 비참한 상황에서 과연 욥의 아내를 악처로 몰아붙일 수 있을까?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는 47세가 되던 해인 1751년에 런던 다리에서 넘어져서 다리뼈를 크게 다친다. 그렇지만 몰리의 극진한 간호를 받게 되면서 사랑에 빠지게 된다. 당시 몰리는 사업가의 미망인으로 이미 자녀가 4명이나 있었지만, 그럼에도 둘은 결혼을 한다. 결혼 4년이 지나자 웨슬리는 자기 동생에게 아내를 비난하기 시작한다. 아내는 자기 사무실에서 도둑질 하고, 남편인 자신을 포로 같이 취급했으며, 외출 시에 아내가 일일이 간섭했고, 개인적인 서류나 서신을 함부로 남에게 공개하였고, 낯 뜨거운 비속어를 사용했으며, 다른 사람을 중상모략 하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질질 끌고 다녔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마치 정신병자 같은 몰리와 결혼한 것일까?


링컨의 부인 메리 토드(Mary Todd)도 소문난 악처다. 어느 날 링컨이 중요 인물과 조용히 대화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와 소리를 지르며 “아까 부탁한 것 어떻게 되었어요?” 하고 물었다. 링컨이 “시간이 없어서 아직 못 했어요”라고 하자, 아내는 화를 버럭 내면서 문을 쾅 닫고 나가며 소리를 질렀다. “내가 부탁한 일보다 다른 일이 그렇게 더 중요하단 말이지?”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손님이 너무 무안하여 쩔쩔매고 있을 때 링컨이 웃으면서 말했다. “여보게 신경 쓰지 말게, 내 아내는 저렇게 크게 감정을 폭발시켜야 안정을 찾는다네, 나는 내 아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둔다네, 그래야 내가 편하거든~~”.


사실 링컨의 아내 메리 토드는 1842년에 성 강박증이 심한 링컨과 결혼한다. 결혼 다음 해인 1843년, 1846년, 1851년 그리고 1853년에 연달아 아이를 출산하며 자녀들을 무척 사랑하며 행복하게 생활하려 했지만, 첫째만 18세를 넘겼을 뿐, 둘째는 어린 나이에 폐결핵으로, 셋째는 11세에 열병으로, 넷째는 1871년에 요절하고 만다. 자녀를 잃은 슬픔과 스트레스에 말년에는 링컨마저 떠나게 되자, 결국 엄청난 스트레스를 극복하지 못하게 되어 1875년에는 정신병원에 입원까지 한다. 이 같은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슬픔과 우울증을 악처라는 이름으로 덮어씌울 수 있을까?


동양에서는 강태공(BC 1156~ BC1017)의 이야기가 유명하다. 강태공의 아내는 엄청난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가출했다가, 강태공이 주 나라 문왕의 눈에 띄어 재상이 되어 돌아오자 다시 합치자고 제의하는 아내에게 물을 길어오게 한 뒤 물을 땅에 쏟고는 다시 주어 담으라고 한다. 엎질러진 물은 그릇에 다시 담을 수 없다는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기게 된 사건이었다.


지금까지 언급한 중근대사 시대 여성들은 가정에서 남편을 섬기고 자녀를 양육해야 하는 현모양처의 시대였다. 여권 신장은 현대에 와서 겨우 인식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나 강태공이 가정을 이끌 경제력이 있었다면, 그리고 욥과 웨슬리와 링컨이 부인과 함께하는 공감하는 능력을 조금이라도 발휘하면서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했다면, 그녀들도 좋은 현모양처가 되었을지 모른다. 누구의 아내도 재산을 몰래 탕진하거나 사치하거나 방탕해서 가정을 파괴하지는 않았다. 남편의 역할을 충실히 했다고 후한 점수를 받을 입장은 못 된다.


1780년부터 영국을 중심으로 시작된 산업혁명 당시 인력부족으로 여성 인력을 충원하기 시작했지만, 여성은 여전히 “직장의 꽃” 정도로 인식되었다. 180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귀족이나 부유한 가정의 여성들도 읽기, 쓰기, 식료품을 사고 거스름돈을 계산할 수 있는 간단한 셈하기 정도의 교육만 허용되었다. 부유한 집안의 딸이라 하더라도 좀 더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으려면 수녀원에 가거나 가정교사를 채용해야 했다. 


1800년 대 말이 되어 여성도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지만 학위 취득은 불가능 했다. 1848년이 되어 처음으로 여성의 선거권을 주장하기 시작했고, 1919년이 되어서 비로소 여성의 선거 참여 법안이 통과됐고, 1920년에 미국 50개 모든 주에서 여성의 선거권이 주어졌다. 여권을 인정하고 허용한 시기는 이와 같이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어서, 이전의 중세 시대에는 여성은 집안에서 밥 하고, 빨래하고, 육아하고, 정성껏 남편 뒷바라지를 하면서 순종하는 현모양처 이상 아무런 어떤 역할도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 당시에는 부부 갈등의 원인을 일방적으로 제공해 놓고 모르쇠로 일관하는 경제력 없는 남편, 가정에 아무런 관심도 없고 협조하고자 하는 노력 없이 일방적으로 악처의 누명을 씌우기만 한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요즘 여성 같으면 결혼을 할 생각도 안 했을 것이고, 살다가도 당장 이혼을 당할 가능성이 뻔했을 것이다. 악처라는 이름도, 현모양처라는 이름도 남편의 역할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며, 나쁜 남편도 좋은 남편도 아내가 만든다. 사랑까지는 아니어도 가정의 일에 함께 소통하며 배려하고 존중하며 살아가면서 부부가 합심하여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우리들 귓가에 세계적인 악처 반열에 올라 있는 여인들은 중세 때 사회적 또는 직업적으로 유명했던 남편의 그늘에 가려 여성의 권리와 가치와 행복을 누릴 기회조차 묵살되었던 현상들이 만들어 낸 허상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이에 비해 현대 여성들은 며칠간의 명절 기간에 있었던 가족 간의 일도 참기 힘든 스트레스가 되어 이혼까지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세기적인 악처들이 오늘날 명절 스트레스로 이혼까지 결심하는 현대 여성들을 어떻게 볼까? 역사가 흐르면서 스트레스를 담는 그릇이 점점 작아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세상사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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