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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3-01-30 06:0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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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오면 제일 먼저 나를 반기는 사진이 있다. 집 사람이 아프기 전 이태리 방향에서 케이블카를 이용하여 알프스 산맥 중턱을 오르는 중에 찍었던 사진과 제주 여행 중에 토종 조랑말을 타고 나란히 찍은 사진이다. 우리 속담에 “사람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고, 말을 낳으면 제주로 보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제주도 하면 특별히 제주의 조랑말이 연상된다.


지금으로부터 약 13,000년 전에 늑대가 처음으로 개로 가축화된 후 차례로 양, 염소, 말, 소, 낙타 등이 가축화되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말은 중앙아시아 대초원에서 유목생활을 하며 지내던 보타이(Botai)인이 약 5,500년 전에 가축화하기 시작해 유럽과 아시아로 퍼져 나갔고, 남미 대륙은 스페인에 의해서 전파됐다고 믿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프랑스 고고학 연구소인 국립과학연구원(CNRS)의 연구원 올란도(Ludovic Orlando) 교수는 프셰발스키(przewalski)가 최초로 가축화된 말의 조상이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말 사육의 초기 장소가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가 아니고 동서양 교류 중심지인 러시아 남부 코카서스라는 곳이 말을 사육했던 최초의 장소라며 고고학적인 자료를 제시하면서 주장하고 있다.


전문가에 따르면 토종 제주마(馬)는 석기시대부터 사육됐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문종 27년 1073년과 고종 45년 1258년 두 차례에 걸쳐 제주에서 고려 정부에 말을 예물로 바쳤다고 한다. 거리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임시로 양엽(盎葉 : 감나무 잎)에 메모해 항아리 안에 두었다가 귀가 후 정리해 기록으로 남겼다는 오늘날의 간단한 메모지 “양엽기(盎葉記) 팔준마(八駿馬)”에 의하면 이성계 장군이 즐겨 탄 준마가 여덟 마리였는데, 그 중에서 응상백(凝霜白)이라는 제주마가 있었다고 한다. 1388년 압록강 위화도(威化島)서 회군(回軍)할 때도 제주마 응상백을 탔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시바 료타로(司馬尞太郎)가 쓴 “탐라 기행”에는 쿠빌라이가 제주도에 파견했던 몽골 기병이 1,700명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토종 제주마의 체고는 암컷이 117cm이고 수컷은 암컷보다 조금 작아서 115cm 정도가 된다. 이러한 제주마는 많을 때에는 2만여 마리나 되었으나, 1985년에 1천여 마리로 크게 감소하여서, 1986년부터 제주 마는 천연기념물 제347호로 지정돼 보호를 받는 처지가 되었다.


사실은 중국 대륙을 침공하여 원(元)을 수립했던 몽고가 1273년부터 탐라(제주)를 침략한 뒤부터 수십 만 마리의 몽고 말이 제주로 유입됐다. 몽고에서는 말을 “멀”이라 부르는데 제주방언으로 말을 “몰”이라 하며, 말 사육자들 사이에서는 지금도 말 색깔의 명칭을 몽고어로 쓰고 있는 점을 보아 몽고의 역사적인 흔적이 남아 있다는 증거가 된다. 그러므로 지금의 제주 마를 고유 재래종으로 단언하기가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정확히 말하면 제주 마는 몽고 마와 잡종화한 것으로 제주의 기후에 잘 적응된 말로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몽고 토종말은 중앙아시아 지역의 야생 프셰발스키라는 말의 후손으로 몽고인들에 의해서 사육된 말이다. 서구에서는 힘이 센 서구식 종마를 선호하는데 반해 몽고인은 유순하고 지구력이 뛰어난 말을 선호하였다. 몽고 말의 체고는 120~140cm이며, 제주 말의 체고는 115~117cm이다. 몽고 말이 제주의 말보다는 조금 더 크지만, 서구의 말은 150~160cm로 몽고말에 비해서 훨씬 더 크다.


말 중에서 체구가 가장 큰 서구의 말은 전속력으로 3km 이상 달리지 못하지만 몽고 말은 서양 말에 비해 10배에 달하는 30km를 고속력으로 달릴 수 있고, 특별히 체구가 작아서 근접전에서 전투병이 민첩하게 연속 공격을 할 수 있다. 특히 말을 타고 달릴 때 등의 반동이 작아서 피로를 덜 느끼며, 말 위에서 연속 사격이나 뒤돌아 쏘기도 가능하다. 더군다나 말이 영리하여 주인이 의도한 대로 잘 따르기 때문에 조용히 숨어 있고 은폐하는 데도 편리하다. 서양 말은 마구간에 넣어 키우지만 몽고 말은 생명력이 강해서 날씨가 거친 야생 들판에서도 잘 살아간다.


이러한 몽고 말 덕택에 유목민인 몽고족이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다. 세계 최대의 해양 국가 대영제국의 영토는 약 3,550만km²이었고, 목축 문화였던 몽골 제국 영토는 러시아 북부지역을 포함한 3,340km²라는 가설도 있으나 이론적으로 러시아의 북방을 제외한 2,300만km² 정도일 것이라 한다. 그래도 한반도의 전체 면적 22만km²보다 100배가 넘고, 남한보다는 230배인 세계의 역사상 두 번째로 큰 영토다. 이러한 방대한 땅을 몽고는 전쟁을 통해 공격하여 직접 통치했던 영토지만, 대영 제국 영토는 정치 경제적으로만 지배했기 때문에 실제로 몽골 제국의 영토가 세계에서 가장 컸다고 말할 수 있다. 로마 제국이 전성기일 때의 영토가 세계 12번째 정도였으니 몽골 제국 영토가 얼마나 넓고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제주 말은 몽고 말과 뗄 수 없는 안 좋은 역사적 관계가 있다. 거란(契丹) 유민들이 1216년, 고종 3년에 고려를 침범하자 고려는 몽고군과 연합하여 강동성에 웅거한 거란족을 섬멸하였고, 연합군이던 몽고(元)의 요구에 따라 형제맹약(兄弟盟约)을 맺으며 외교관계를 갖게 됐다. 이런 동맹 관계를 계기로 몽고가 과도한 공납을 요구하고, 마침 몽고의 사신 저고여(著古與)가 몽고로 돌아가는 도중에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후에 몽고와 국교를 단절하게 되었고, 급기야 몽고가 1231년부터 29년 동안 7차례 고려를 침략하게 된다. 몽고가 1차 침입(1231년)을 했던 이듬해인 1232년에는 실질적 집권자 최우(崔瑀)를 중심으로 하여 항전을 결의하고 강화로 천도한다. 이 후 1270년(元宗 12년)에 수도를 다시 개경으로 환도할 때까지 무려 38년 간 강화는 고려의 임시 수도가 된다. 강화로 천도를 한 후에 몽고에 대한 항전 의지는 종교적, 군사적인 활동이 활발하게 된다. 1236년(高宗 23년)에는 부처의 힘으로 몽고를 물리치겠다는 의지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초판을 만들게 된다. 연인원 15만 명이 동원되어서 15년 동안 총 81,258장의 목판을 이용해 84,000개의 부처 가르침을 목판에 새기기 시작해서 15년만인 1251년(高宗 38년)에 완성하게 된다. 그런 다음에 태조가 1398년에 해인사로 팔만대장경을 옮기기 전까지 강화에 보존되었다.


두 번째 활동은 허술한 정부군에 비해 훨씬 강한 별초(别抄) 부대를 운영하였다. 별초는 1174년(명종 4년)에 도둑을 잡기 위한 순검군(巡検軍)의 역할을 하는 야별초(夜别抄)의 조직이었지만, 몽골의 침략이 격화되면서 정규군 역할을 대신하여 전투조직으로서의 별초군(别抄軍)을 운영하게 되었다. 별초의 조직이 방대해지자 다시 좌별초(左别抄)와 우별초(右别抄)로 나눈 다음, 후에 몽고군에 잡혔다가 탈출해서 돌아온 군사들로 새로 신의별초(神義别抄)를 창설하여 이를 합하여 삼별초(三别抄)라 불렀다.


고려 24대 원종(元宗)이 몽고에 항복하며 삼별초 해산을 명령하자, 이에 반기를 들고 배중손(裵仲孫)과 노영희(盧永僖)를 지휘관으로 삼고, 1270년에 무력으로 원종을 폐하고 왕족이었던 승화후(承化候) 온(溫)을 임금으로 추대하면서, 3일 만에 재물과 인질들을 1,000여 척의 배에 싣고 근거지를 진도로 옮긴다. 이에 1271년 홍다구(洪茶丘)가 이끄는 몽고군과 정부군의 협공으로 진도를 점령한다. 그러자 살아남은 군졸이 합심해 김통정(金通精)을 수령으로 삼고 본거지를 다시 제주도로 옮겨 가면서 계속 항전을 이어가게 된다. 그러나 결국 1273년(元宗 14년)에 여몽 연합군(麗蒙 联合軍, 麗元 联合軍)에 의해 삼별초의 항거 활동은 3년 만에 막을 내린다. 이렇게 별초 정벌을 위해서 제주에 상륙한 몽골군은 군마(軍馬)를 기를만한 광활한 목초지를 찾게 되었고, 1276년에는 제주에 몽고 말 160필을 방목하기 시작했다. 말을 제주에 방목하면서 몽고 본국에서 죄수들을 제주도에 유배시켜서 목동으로 활용도 했다.


여기에 고려로부터 공녀(貢女)로 끌려왔다가 고려 출신의 환관(내시) 고용보(高龍普)의 도움으로 몽골(元) 11대 마지막 황제인 혜종(惠宗, 順皇帝)의 차녀(茶女)에서 황후로 추대된 기황후(奇皇后)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본관은 행주이며 충북 진천군(鎭川郡) 이월면(梨月面) 노원리(老院里) 궁동 출신이다. 기자오(奇子敖)의 막내딸로 위로는 오빠 다섯과 언니가 둘이나 있었다. 원(元)의 황태자였던 순제(順帝)가 1330년 황실 내부의 권력 다툼으로 10대 초반에 인천 앞바다 대청도(大青島)에서 1년 5개월의 유배생활을 끝내고 2년 후에 황제에 오르는데, 고려에 대한 순제의 추억을 함께할 차녀(茶女)로 그 녀가 선택된 후에 황후의 자리에 오른다.


당시 한족(漢族)은 피지배층으로 몽고인에게 최하위의 핍박을 받았고, 고려에서 끌려온 환관과 공녀는 그래도 신분 상승의 기회가 어느 정도 가능했던 환경이었다. 황후가 된 후에 그녀는 친정아버지를 영안왕(榮安王)으로 봉한 후에, 다시 경왕(敬王)에까지 추서한다. 오빠 기철(奇轍)은 몽고(元)의 관직과 고려 정부의 정승으로 임명되고, 또 다른 오빠 기원(奇轅)은 덕양군(德陽君)으로도 봉하면서 친인척이 고려의 실세로 등장한다.


기황후는 대량으로 몽고(元)에서 말을 들여와 사설 목장을 운영하며 친인척들의 경제적인 재원(財源)을 마련하였는데, 그들의 말에 “왕(王)”자를 낙인해서 말의 가격을 갑절로 팔기도 했다. 1361년에는 주원장(朱元璋)이 25만 명의 홍건적(紅巾賊) 등을 앞세워서 몽골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한족(漢族) 중심의 명(明) 나라를 세우는데 성공하고, 고려의 공민왕(恭愍王)도 반원자주(反元自主) 정책을 펴며 기철 등을 포함한 기황후 친척 세력을 모두 처단한다. 이에 기황후는 혜종을 설득해 고려 공민왕을 폐위하고, 홍선왕의 셋째 아들인 덕흥군(德興군)을 왕위에 책봉한다. 고려가 이에 따르지 않자 기황후는 복수심을 품고 1364년에 덕흥군에게 몽고(元) 군사 1만 명을 주어 고려를 정벌하게 한다. 한 때는 몽고 군사가 평안도까지 진출했지만 고려의 최영(崔瑩)과 이성계(李成桂)에게 대패한다. 경기도 연천군(漣川郡)에서 그의 무덤을 발견해서 향토문화재 제18호로 지정해 보호 중이라 하지만 아직까지 학술적으로 검증되지는 않았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제주말의 순종을 찾기가 힘들어 졌다. 몽고 말이 제주에 발을 디딘 지 700여 년이 넘었지만, 아직 몽고 말의 유전 특징은 남아 있다고 한다. 몽고 말들은 풀도 탐욕스럽게 남김없이 뜯어 먹지만, 먹성이 좋아 나무 잎도 잘 먹으며, 우두머리 말에 잘 복종해서 단체 활동도 잘 하면서, 우두머리가 잡혀도 도망가지 않고 질서를 유지해 가면서 신의를 지킨다고 한다. 제주 마는 3월에서 4월에 발정한다. 암말은 14개월이 되어야 첫 번째 발정을 하고, 발정의 주기는 21일 정도이고, 임신 기간은 336일로 알려져 있다. 암말은 보통 4월과 5월에 몸무게가 평균 22kg 정도 되는 새끼(망아지)를 낳는다. 수말은 보통 20~30 마리의 암말을 거느리며 무리생활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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