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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11-01 07: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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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병화 문학관


누군가 수십 년 간 머물던 공간, 특히 치열하게 살다간 분들의 삶터와 육필 원고, , 그림, 사진이 남아 있는 기념관은 그 체취가 유난히 깊다. 사람들이 나이 들며 멋있게 익어가는 모습을 보면 바람과 시간이 그들에게 독특한 빛깔과 내음을 입힌다는 생각이 든다. 커다란 밤나무 아래 수북이 쌓인 밤송이를 보며 사람뿐 아니라 빛을 추수하는 10월의 고목 역시 가을빛에 훈연한 느낌이 든다.


올해로 탄생 101년을 맞이하는 조병화 시인의 문학관에 다녀왔다. 시인은 생전에 53권의 창작시집과 수많은 번역서와 에세이집을 내고 꾸준히 그림을 그렸으며,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럭비까지 하며 문인이자 체육인으로 살았다. 그 분이 남긴 삶의 족적을 따라가며 어떻게 한 개인이 82년의 생애를 그토록 풍성하게 채우며 살았는지 놀라웠다. 일제의 강점기에 태어난 수재가 평생 문학, 미술, 체육 분야에서 남다른 재능을 갈고 닦아 거둔 결실을 모아둔 곳간이라고나 할까.


시인은 부조리한 세상을 비판하며 난해하고 어두운 현대시로 시대의 아픔을 노래했던 지식인들과는 달리 도시인의 외로움과 현실의 고독을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표현했다. 대체로 가난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타향을 떠돈 문인들이 많았으나 그 분은 자신이 태어난 마을에 모친이 살 집 편운재(片雲齎) 마련해드리고 본인의 묘 자리까지 정한 후 삶을 마무리했다. 결코 범상치 않은 일이다.


나이가 들어도 나답게 살아가며 세상에 기여하고 추수를 잘 하면 긴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하기 위한 양식을 넉넉히 얻을 수 있다. 주어진 달란트로 좋은 열매를 거두는 것은 다음 세대를 위해 씨앗을 남기는 신성한 갈무리이기도 하다. 요즘 흉년이 들어도 종자는 까먹지 않고 남겨가며 농사 짓 듯 충실하게 살다 여유로운 노년기를 보내는 분들을 자주 만난다. 온화하고 너그러운 성품에, 자기 돌봄과 건강관리를 잘 해서 활력이 넘치고, 재정적 시간적 자유가 있어서 베푸는 삶을 산다. 그런 분들의 특징은 변화를 용기 있게 받아들이고 새로운 것을 두려움 없이 시도하는 것이다.


팔순이 넘은 외삼촌이 며칠 전 구청장으로부터 표창장을 받았다고 자랑을 하셨다. 무슨 일을 하셨기에 표창장까지 받으셨냐고 여쭤보니 경로당에서 사무장 일을 본다고 하셨다. 젊어서 구청공무원으로 일한 경력을 살려 지역의 노인들을 위해 꾸준히 자원봉사를 하신다기에 표창장을 받으실 만하다고 축하해드렸더니 싱글벙글 웃으며 기뻐하셨다.


연세가 들어도 건강하고 사회에 기여하며 멋진 삶을 사는 노년을 골드 에이지라고 부른다. 노인이 된다는 것, 멋진 노년을 맞이하는 것은 젊은 시절의 성공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다. 누구나 늙고 병들어가지만 아무나 노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랜 세월 열심히 일하며 자녀를 낳아 기르고 성인으로 키워 독립시키고 숱한 위험과 질병 속에서 살아남아야 차곡차곡 나이가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기에 평화로운 모습으로 노년을 보내는 분들을 만나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웰빙(Well-being)을 외쳐왔지만 노년이 길어지는 이 시대에는 웰다잉과 함께 아름다운 마무리-웰리빙(Well-leaving)-도 준비해야 한다. 외로움 속에서도 굳건하게 땅 위에 발을 붙이고 소망을 품은 채 웰빙을 거쳐 웰리빙을 완성해가는 아름다운 노년, 실버 에이지를 넘어선 골드 에이지가 아름답다. 문학관을 둘러보고 나오는데 집 앞 논에서 추수를 기다리는 황금빛 벼가 무거운 나락이 영근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눈부신 금빛 추수마당이다.


그는 언제나 그늘에 서있다.

햇살은 나무를 넘어 땅에 엎드리고

나지막이 속삭이는 그늘이 되었다.

해 짧은 마을의 나뭇잎은 일찌감치 낙엽이 되지만

그늘 속에서 자란 풀들은 맨 나중에 겨울잠을 청하고

푸르른 채 겨울을 나기도 한다.


그늘 속의 그도 늘 깨어있어

풀잎처럼 오래 햇살의 친구가 되고

겨울바람 껴안은 채 태양의 첫딸인 나무를 노래한다.


햇빛을 흠뻑 머금은 태고의 나무

쓰러져 석탄이 되고 금강석으로 환생을 하듯

그는 춥고 어두운 곳에 머물며 신열을 앓다

비로소 빛의 낟알들을 시어로 털어낸다.


태양의 전설이 어두움 속에서 다시

언어로 일어서는 신기한 생산

그늘에서 조용히 벌어지는 빛의 추수


세상은 그를 시인이라 부른다


(필자의 졸시, 시간의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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