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 기사등록 2022-10-17 19:42:29
기사수정


▲ 쌍녀분(雙女墳) 표지석


나는 정년퇴임 후 중국 쑤저우(蘇州)대학에서 외국인 초청 교수의 신분으로 3년 간 재직할 때 최치원(崔致遠:857~ ?)과 연관이 있는 쌍녀분(雙女墳)이 이 지역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학생 2명과 함께 12일의 일정으로 답사에 나섰다. 난징(南京)에서 하루를 묵고 아침 일찍 남경에서 리수이(溧水:율수)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리수이에서 내려 리쟈춘(李家村) 부근에 있다는 쌍녀분의 소재를 수소문 했으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기 어려웠다.


택시를 전세 내어 쌍녀분 소재를 수소문하여 논 한복판에 관리되지 않은 채 자리하고 있는 초라한 한 기의 묘지를 찾아냈다. 이 묘지가 쌍녀분일 것이라 판단하고 논둑을 따라 조금 걸으니 조그마한 도랑을 건너는 시멘트로 만든 작은 다리가 보인다. 그 다리에 선명하게 치원교(致遠橋)”라고 쓰여 있어서 내가 찾는 최치원의 쌍녀분이 이 부근에 있음을 확신했다. 이 다리를 건너 200~300m 앞으로 더 걸어가니 제멋대로 자란 나무들이 봉분을 가리고 있는 1,000년 넘게 보존된 쌍녀분이 쓸쓸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최치원은 경주 최씨의 시조로 자()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으로 신라 문성왕(19) 시절에 최견일(崔肩逸)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신라에서는 출세 길이 보장 되는 엘리트 코스로 당나라 유학이 유행이었다. 837년 한 해에만 216명이나 되는 학생이 당나라에 유학을 갔을 만큼 당나라로의 유학 열풍은 최고에 이르렀다.


최치원도 868(경문왕 8) 12세의 어린 나이로 당시 인구 100만을 자랑하는 대도시 서안(西安)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아버지는 “10년 안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어디 가서 내 아들이라 하지도 말아라. 나도 아들이 있다고 말하지 않겠다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는 당나라에 유학한 지 7년만인 875년에 18세의 나이에 외국 유학생을 대상으로 치르는 과거시험 빈공과(賓貢科)에 장원급제 한다. 아직 어려서 관직을 받지 못하다가 20세가 된 877년에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리수이현(율수현 : 溧水縣)의 현위(縣尉)라는 종9품의 말직을 얻는다.


리수이(溧水)라는 동네 남쪽에 초현관(招賢館)이 있었고, 초현관 앞에는 쌍녀분이라는 오래된 무덤이 있었는데, 이곳은 예로부터 많은 명현들이 쉬는 곳이었다. 어느 날 최치원이 쌍녀분에 관한 시를 지어 읊었더니, 홀연히 두 여인의 시녀인 취금(翠襟)이 나타나 쌍녀분의 주인공인 팔낭자(八娘子 : 언니)와 구낭자(九娘子 : 동생)가 최치원의 시에 화답하는 시를 가져다주었다. 시를 읽고 감동한 최치원이 다시 두 여인을 만나고자 하는 시를 지어 보내고 초조하게 기다리니, 얼마 뒤 이상한 향기가 진동하면서 아름다운 두 여인이 나타났다.


서로 인사를 나눈 뒤에 최치원이 두 여인의 사연을 듣고자 하였다. 원래 그들은 리수이 현의 부자 장()씨의 딸들로 언니가 18세가 되고 동생이 16세가 되던 해에 그녀들의 아버지가 시집을 보내고자 하여 언니는 소금 장수에게, 동생은 차() 장수에게 정혼하였다. 그러나 그녀들의 뜻은 달랐기에 아버지의 뜻을 따를 수 없다고 했고, 이를 고민하다가 마침내 죽음을 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여인을 함께 묻고 쌍녀분이라 이름 짓게 되었다. 이렇게 한을 품고 죽은 그녀들의 마음을 알아 줄 사람을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다가, 마침내 최치원 같은 수재를 만나 회포를 풀게 되어 기쁘다고 말하였다.


세 사람은 곧 술자리를 베풀고 시로써 화답하며 즐기다가 흥취가 절정에 이르자, 최치원이 서로 인연을 맺자고 청하니 두 여인 또한 좋다고 하였다. 이에 세 사람이 베개를 나란히 하여 정을 나누니 그 기쁨이 한량없었다. 이처럼 즐기다가 달이 지고 닭이 울자 두 여인은 이제 작별할 시간이 되었다면서 시를 지어 바치고는 사라져 버렸다. 최치원은 그 다음 날 지난 밤 일을 회상하며 쌍녀분에 이르러 그 주위를 배회하면서 장가(長歌)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이상의 쌍녀분 설화는 최치원 본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세상을 떠난 비현실계의 영혼과 사랑을 나누는 시애설화(屍爱說話), 인귀(人鬼)교환설화, 최치원 설화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작품은 고려 때 박인랑(朴寅亮)이 지은 한국 최초의 설화집 수이전(殊異傳)”에 기록돼 있고, 당나라의 육조사적(六朝事蹟)”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 당시 당나라에서는 쌍녀분가(雙女墳歌)”라는 제목의 시가 희극화 되었을 정도로 유명한 설화였다.


리수이현(溧水縣)의 현위(縣尉) 임기 3년을 마친 후 다시 대기하는 사실상 백수가 되자 현직 관리를 대상으로 실시하는 일종의 승진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산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당나라 말기의 정세가 매우 혼란해지면서 시험은 취소되고 미래도 보장하기 어렵게 되었다. 결국 23세의 나이인 879년에 당시 회남(淮南) 지역의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였던 고병(高駢, 고변)의 추천으로 관역순관(館驛巡官)이라는 비교적 높은 벼슬을 얻어 조세 징수, 곡물 운송, 운하 관리 등의 업무를 맡는다.


그런데 24세가 되던 880년에 산동성 지방 소금 밀매업자 황소(黄巢)가 황소의 난을 일으키자 고병(高駢)이 토벌에 나서게 되었고, 최치원도 이를 도와 고병과 함께 4년 간 토벌 작전에 참여하게 된다. 양저우(陽州)에 주둔하면서 881년에는 1,050자로 된 유명한 격황소서(檄黃巢書)”를 작성하여 적의 기세를 꺾는다. 그런 치적이 인정되어 최치원은 종5품인 승무랑시어사내공봉(承務郞侍御史內供奉)을 얻게 된다


어사대(御史臺) 소속으로 관리를 감찰하고 시정의 풍속을 바로잡는 관직이다. 여기에 황제로부터 붉은 주머니인 자금어대(紫金魚袋)까지 받는다. 그러나 고병이 도교에 심취하며 직무에 소홀하여 파직되자 최치원도 17년간의 당나라 생활을 정리하고 885년에 29세의 젊은 나이로 고향 신라로 되돌아온다. 양저우에 있는 최치원 기념관에 가면 당시 그의 역사적 치적을 엿 볼 수 있다.


귀국 후 처음에는 상당한 의욕을 가지고 당나라에서 배운 경륜을 활용하고자 하였으나, 당시 신라는 이미 붕괴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결국 국정의 문란함을 깨닫고 890년에 외직(外職)을 원해 전북 태인, 경남 함양, 충남 서산 등지의 태수를 역임하였다. 그러나 신라 왕실에 대한 실망과 좌절감을 느낀 나머지 40여 세의 나이에 관직을 버리고 은거를 결심 한다.


벼슬을 버리고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으로 가던 중 지금의 부산 해운대 자리에 들렀다가 달맞이 절경에 심취하여 머무르며, 동백섬 남쪽 암벽에 해운대(海雲臺)”라는 세 글자를 음각하였는데 후에 이 글자를 따서 이곳의 지명으로 쓰게 되었다 한다. 마지막에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은거생활을 했는데, 908(효공왕 12) 말까지는 생존이 확인되고 있으나 그 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고 전해지고 있다.


나는 최치원과 연관이 있는 난징(南京) 지역의 쌍녀분과 양저우(陽州)의 최치원 기념관, 김대건 신부가 한국인 최초로 세례를 받았던 상하이(上海) 지역의 옛 성당, 장보고가 무역의 전초 기지로 활용했던 닝보(寧波) 지역, 그리고 이미 발굴하여 역사의 교육현장으로 활용하고 있는 상하이(上海)에 있는 임시정부 등 옛 한국 선조들이 빈번하게 왕래했던 양자강 남쪽의 강남(江南) 삼각주 지역의 역사적 교류의 발자취를 한층 더 상세히 연구하여, 이 지역을 방문하는 한국 관광객들에게 알맞는 한국형 관광 프로그램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국의 몇몇 관련 전공 교수와 소주대학 교수들과 협의하여 문화관광체육부와 교육부에 3년 기간의 국제 연구 과제를 신청했지만 채택되지 않았다. 내가 연구 총괄 책임자를 맡았는데, 당시 나는 이미 퇴직한 명예교수 신분이어서 그러한 조건도 탈락되는데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유럽과 미국 등 선진국에서 온 관광객들은 먹거리 관광 프로그램도 있지만 이 지역을 조차했던 과거의 역사적 흔적이나 자국과 관련이 있는 역사적 흔적들을 둘러보는 고유의 관광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 관광객은 대부분 이 지역의 유명한 역사적 유물이나 발전된 시설을 돌아보거나 큰 명물 시장이나 진기한 식당을 돌아보며 돈이나 쓰는 쇼핑관광으로 짜여 있다. 관광객은 모델처럼 화사하게 꾸며 입고 귀국 후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하려는 사진을 촬영하는데 바쁜 모습을 보면 가슴 한 구석 씁쓸함을 느낀다. 이 지역의 특수한 자연환경 속에서 피곤한 육체를 재충전하면서 우리 역사에 관련된 마음의 양식도 함께 쌓을 수 있는 관광 프로그램이 준비되기를 기대해 본다.


TAG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whytimes.kr/news/view.php?idx=13188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정기구독
교육더보기
    게시물이 없습니다.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