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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07-01 15:01:17
  • 수정 2022-07-01 15: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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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초부터 한국은 생산자중심 시대에서 소비자중심 시대로 옮겨가는 과정에 들어서게 된다. 이공 계열 출신의 생산중심 시대에서 경영 계열의 판매나 마케팅전략이 중요한 기업의 목표가 되기 시작하던 때다. 이 무렵 나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사단법인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런데 S그룹 기획실에서 우리 연구소에 마케팅 관련 연구 과제를 위탁했다. 당시 S그룹의 영업 전략은 최고의 인재를 채용해서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 최고의 회사를 만든다는 것이었는데 그렇지 못한 제품이 있어서 그 제품을 최고로 만들 수 있는 전략이 무엇인지를 연구하는 과제였다.


당시 연구 기간은 1년이었고, 연구비가 300만 원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당시 국내 연구비로는 상당히 높은 가격이었다. 서울에서 원만한 집 한 채는 살 수 있었던 거금이었기 때문이다. S그룹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는 조미료 미풍이 경쟁제품 미원에게 밀려 시장점유율 1위를 탈환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 연구소에 의뢰한 과제는 조미료 미풍이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할 수 있는 전략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당시는 소비자라든지 마케팅이라는 용어도 상당히 낯설어서 전문가들만이 겨우 이해하는 용어였다. 우리 팀은 시내 외국서적을 판매하는 서점에 들러 마케팅이라든지 소비자라는 제목의 책은 모조리 샀다.


자문교수 한 분과 연구 책임자 1명 그리고 연구원 3~4명이 이 과제의 연구팀이 되었다. 우리 팀은 필운동에 소재한 여관 방 하나를 장기계약하고 숙식을 하면서 매일 원서를 읽고 저녁에는 읽은 부분을 발표하며 연구에 적용할 내용을 밤늦게까지 토론했다. 요즘 연구원들에게 이렇게 근무하라고 하면 특근 수당이 어떻고 근로조건과 근무시간 등 여러 이유로 근무자 권리에 대한 쟁의를 논하겠지만 그 때는 일 자체가 즐거워서 모두들 한 동안 집에도 못 가면서 열심히 연구에 임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3단계로 연구를 나눠 진행하기로 했다. 1단계는 소비자들이 갖고 있는 조미료에 대한 일반적인 태도와 특정 브랜드 제품을 구매하는 이유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두 번째 단계는 두 제품에 대한 실험시장(test market)을 하여 각 제품에 대한 구매의도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마지막 세 번째 단계는 매장 내에서 소비자의 시선 집중도를 연구하여 매장에서 가장 좋은 진열대의 위치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소비자 조사로 부터 얻은 결론은 소비자들이 특정 제품명을 요구하며 그 제품을 구매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조미료라는 뜻으로 그 제품명을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래서 실험시장에서 특정 제품을 요구하는 소비자에게 경쟁 제품을 권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를 알아보았다. 그런데 특정 제품을 요구하는 소비자도 판매원이 경쟁 제품을 제시하거나 권해도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판매원이 권하는 제품을 구매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래서 세 번째는 소비자들이 매장에서 어디에 시선을 집중하는 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시선추적 카메라(eye camera)를 이용하여 관찰했다. 그 결과 소비자들은 매장에 들어와서 ××쪽 방향으로 돌아 ××쪽 방향으로 나간다는 사실과 ××층 높이의 진열대에 집중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우리는 이런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새롭고 획기적인 마케팅 전략을 제안했다.


첫째로 조미료를 살 때 경쟁 제품명을 호칭하는데, 그것은 바로 그 제품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조미료라는 일반 명사로 사용하는 것임이 밝혀졌다. 따라서 향후 미풍이나 미원이라는 제품명을 강조하는 광고나 마케팅 전략을 끝내고, 전혀 새로운 제품으로 홍보나 마케팅 전략을 기획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이제 화학조미료의 시대는 끝났고, 건강을 위해 새로운 천연 조미료의 시대가 왔음을 홍보하고, 이러한 새로운 조미료 시장에서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할 수 있는 전혀 새로운 제품과 제품명을 권고한다.


두 번째는 식료품 시장의 판매원과 회사 영업직원에 대한 판매 교육을 강화시킬 것을 권한다. 소비자가 특정 제품을 요구해도 판매원의 권에 따라 어떤 제품도 판매할 수 있음을 주지시키고 영업사원과 시장 판매원에 대한 판매 교육을 강화시켜야 한다.


세 번째는 매장에서 소지자의 눈에 잘 띄는 선반의 위치는 매장 입구 ×××층 진열대이므로 영업사원으로 하여금 그 진열대 확보를 위한 전략을 강력하게 권하는 것이었다.


대개 이런 내용으로 연구결과를 보고했는데, 기획실에서는 새로운 긍정적인 마케팅 전략을 수립할 수 있겠다며 우리의 연구결과에 무척 만족해하고, 전국에 있는 영업 및 판매직원들에게 이런 연구결과를 순회 브리핑을 해달라는 추가적인 부탁도 받았다.


그런데 이런 지방순회 보고가 끝나자 나는 회사로부터 뜻밖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한 마디로 거절했으나, 특급 혜택을 준다는 조건으로 계속 설득을 해와 끝내는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할 수 없게 되었다. 높은 직위와 매주 2회 대학 강의 허용, 그리고 1년 치 상여금 수령에 대한 보장 등등의 약속을 받고 직장을 옮기게 되었다. 그 해 10월 말에 20대 후반의 나이로 부서 책임자로 부임해 보니 동료 부장들은 대체로 50대여서 함께 어울리기가 참 힘들었다.


출근 첫 날 사장은 나와 함께 둘이서 점심을 하려고 종로 3가에 있는 어느 뒷골목 한정식 요릿집으로 갔다. 한복을 곱게 입은 아가씨들의 환영 속에 방에 들어가니 방 한쪽에서는 우리 둘을 환영하기 위해 가야금이 연주되고 있었고, 보루로 만든 자리에 앉으니 두 명의 아가씨가 양쪽에서 음식 시중을 드는데 20대의 젊은 나는 참으로 좌불안석이었다. 밥을 먹으며 사장께서 들려준 이야기는 지금도 가슴에 담고 삶이 어렵고 힘들 때마다 그 이야기로 위로하곤 한다.


일본에서 있었던 어느 광고회사 영업부 직원(AE: Account Executive)의 실화라고 했다. 사업에 성공한 어느 사장이 자사 상품에 대한 광고를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텔레비전에 처음으로 광고를 하게 되어 광고가 나오는 시간에 맞춰서 자축 겸 자랑 삼아 지인들과 함께 요정에 모였다. 그런데 방송사의 실수로 광고가 방송되지 않았고 사장은 지인들에게 놀림을 받았다.


사장은 화가 나서 바로 광고회사 직원을 요정으로 불러 친구들 앞에 무릎을 꿇리고 그의 머리에 방뇨를 했다고 한다. 그런 수모를 당하고도 그 직원은 사장에게 이해를 구하고 다시 한 번 기회를 달라고 간청했다. 간신히 기회를 다시 얻게 되었고 그 후 약속을 생명처럼 가슴에 담고 일에 충실했다.


그런 세월이 흐른 후 그 직원은 당시 일본에서 가장 성공한 ××광고회사 사장이 되었다는 줄거리였다. 머리에 소변 세례를 받아도 능히 참고 견디어 내는 마음으로 업무에 충실하라는 사장의 당부 말이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가슴에 새기며 최선을 다하여 근무했고, 곧 조직을 마케팅국으로 확대 개편하여 국장 대우로 승진한 후 그룹 기획실의 인재양성 프로그램에 의거 당시 일본의 세계 최대 광고회사인 전통(電通)을 비롯하여 박보당(博报堂)과 제일기획(第一企劃) 등에 장기 연수를 떠났다. 일본에 있는 동안 내 통역은 한국에서 교환교수로 온 50대 후반의 교수였는데, 일본어에 능통하고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 낙천적인 교수였다.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그는 나를 우에노(上野)공원 한 귀퉁이에 있는 백제인 왕인(王仁) 박사 비석 앞으로 호출했다. 취하도록 술을 거나하게 마시면서 그 자리에서 나눈 이야기는 내 삶에 큰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개인 기업의 이익보다는 국가를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보다 더 의미 있는 삶이라는 대화였다. 왕인(王仁) 박사 비석 앞에서 굳은 결심을 하고 바로 해외 장기 연수를 포기하고 귀국하여 사표를 제출했다. 회사에서 향후 중역으로의 승진까지 약속하며 퇴사를 만류했지만 이를 뿌리치고 끝내 사표를 제출했다. 퇴직금은커녕 관련 연수비용과 위약금까지 지불하고 다시 학교로 되돌아가서 처음부터 희망했던 교직의 길을 다시 걷게 되었다.


직장으로서의 교직이 아닌 국가를 위한 사명감으로 지방의 한 국립대학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 곳에서 40년 간 타향살이를 하게 되었다. 잠시 몇 년 간 회사 생활이라는 외도를 했지만 나에게는 삶의 좋은 약이 되었던 추억이었다. 물론 첫 출근 시 사장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는 그 후 관련 과목을 강의할 때마다 빼놓지 않는 나의 단골 강의 메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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