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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06-27 13:12:21
  • 수정 2022-06-27 15: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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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네이버]


아파트 입구에 매주 목요일이면 일일 돈가스 가게가 포장을 치고 동네 손님을 기다린다. 맛이 있어서 늘 문전성시를 이루는데, 나도 매주 빠짐없이 여기서 돈가스를 산다. 돈가스는 내가 대학 3학년 시절인 1960년대 중반 일반 식당보다는 조금 격조가 높은 경양식 식당에서 잘 팔리던 고급 메뉴였다. 돈가스는 본래 서양 명칭인 포크 커틀릿(pork cutlet)을 일본식으로 바꾸고, 다시 한국으로 유입되면서 돈가스로 부르게 되었다. 포크는 ()”으로, 커틀릿은 카쓰레쓰(カツレツ)”로, 약칭 돈카쓰가 한국식으로 돈가스 또는 돈까스로 불린다. 사실 일본의 덴무 천황(天武天皇, 603~682)675년에 불교를 국교로 지정하면서 도축과 육식이 금지되다가 메이지 천황(明治天皇, 1862~1912)1868년에 서양문화를 유입하면서 육식금지가 해제되고 포크 커트릿이 들어왔다.


나와 돈가스는 장거리 구보와 얽힌 기막힌 사연이 있어서 기억을 지울 수가 없다. 요즘 날씨가 좋아서 산책길에 조깅이나 장거리 구보를 하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띈다. 동네 산책길을 따라 한강 쪽으로 편도 7km, 왕복 14km정도이니 웬만한 사람은 운동하기 좋은 거리다.


중학교 시절 동대문 부근에 있던 옛 서울종합운동장에서 전교학생을 대상으로 체력장을 실시했다. 그 중 2km를 달리는 종목도 있었는데 꽤 좋은 기록으로 뛰었던 기억이 있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운동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장거리 달리기를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매주 2번 정도 뛰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계동 내 집에서 친구의 집인 돈암동 전차 종점까지 뛰었다. 아마 왕복으로 15km는 될 것으로 추측된다. 거기에 친구 집이 있었기에 잠시 물도 마시고 쉴 수도 있어서 좋았다. 요즘처럼 조기에 적성을 발굴하여 열심히 훈련했다면 아마도 체육인의 길을 걸었을 지도 모를 정도로 여러 가지 운동적성이 있었다.


대학생 때는 4.18 기념일에 학교 운동장을 출발하여 수유리에 있는 4.19 기념탑까지 왕복하는 마라톤 대회가 열렸는데, 나는 맨발로 뛰어 일반 학생부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완주해서 상품으로 냄비까지 받았던 기억이 있다. 발바닥이 모두 헤어져 덜렁거릴 정도로 부상을 입고 한 달 정도 고생을 했다.


대학교 졸업과 함께 ROTC(6) 해병대 1기 소위로 자원하여 진해에 있었던 해병학교에 기초반 23기로 해사를 졸업하고 해병으로 자원했던 사관생도와 함께 해병훈련소에 입소했다. 지원서 특기란에 나는 장거리 구보라고 기록했던 것 같다. 그런데 훈련은 생각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육군 ROTC 정신을 해병 정신으로 바꾸어 월남전에 파병해야 했으며, 특히 북한 특수부대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 사건이 있은 후 훈련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4개월 동안에 평균 300대 정도의 야구 방망이 빠따를 맞았고, 이미 고인이 된 고대 ROTC 동기생 한 명은 360대 이상 맞아 해병학교 졸업식에서 그 야구 방망이를 기념품으로 받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때는 약혼 사이였던 집사람이 간혹 주말에 훈련소에 면회를 와서 내 몸 상태를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해병 훈련을 포기하라고 권고하기도 했다. 야구 빠따로 엉덩이가 헤어져 발 뒤꿈치 아래까지 핏기가 굳어서 목욕탕도 못가고, 무릎도 굽힐 수가 없어서 식당에서도 편안하게 앉아서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집사람은 내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내가 좋아했던 돈가스를 선배 해사교관 집에 소포로 보냈다.


그리고 드디어 그 돈가스 때문에 잊지 못할 장거리 구보를 경험하게 되었다. 토요일 외출과 함께 선배의 집으로 달려가서는 소포로 배달되어 온 돈가스를 선배에게 줄 한 조각만 남기고는 허겁지겁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먹어버렸다. 저녁에 선배가 귀가하자 약혼녀가 보내준 것이라며 남겨 놓은 돈가스 조각을 선배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선배는 깜짝 놀라 이것을 먹었느냐며 난감해 했는데, 자세히 보니 돈가스는 이미 파랗게 곰팡이로 덮여 있었다. 나는 급하게 약을 사먹고 일요일 저녁에 부대에 복귀했다.


외박을 한 후에 일요일에 부대에 귀대하면 의례히 외부 물을 뺀다며 연병장을 몇 바퀴씩 구보를 했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다음 월요일부터 순번에 따라서 내가 소대장 학생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하반기 훈련은 상남이라는 곳에서 주로 야전교육을 받았다. 아침에는 야전 교육장까지 구보로 뛰어 갔다가 오전에 훈련이 끝나면 다시 부대로 구보로 뛰어와 장교 외출복으로 갈아 입고 점잖게 점심을 먹고, 다시 훈련복으로 갈아입고 또 야외 교육장으로 뛰어갔다. 점심시간이 한 시간인데, 이런 저런 시간을 제하면 정작 점심은 늘 5분 내외로 해결해야 했다. 복통으로 이런 일정을 금요일까지는 근근이 버텼지만 토요일이 문제다. 토요일 오전 교육이 끝나면 장거리 구보나 천자봉(해발 650 m)을 뛰어 오르고 나서 외박하는 것이 통례였다.


운명의 토요일인 그 날은 창원에 있는 상남 야외교육장에서 마산시내 어느 로터리까지 완전 군장을 하고 왕복을 뛰어야 했다. 소대장으로서 나는 부대 앞에서 인솔자로 뛰어야 했는데 2km 정도를 뛰었던 기억은 있지만 그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기억이 가물 가물하다. 여러 번 쓰러졌던 기억은 있는데, 그 때마다 같이 뛰었던 동기들의 심한 질책이 따가웠고 그 때마다 정신을 차릴 때까지 구대장의 물통 세례를 받아야 했다. 한 번 쓰러지면 다시 정신을 차려 대열에 합류할 때까지 부대는 뛰어오던 반대쪽 방향으로 뛰어야 했다. 다른 부대와도 경쟁을 해야 했고, 완주해야 할 시간도 있어 1초가 아쉬운 순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정해진 시간에 들어와야 했는데 시간을 초과한 소대는 전원 외박을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쓰러져 못 뛰게 되면 우리의 소대 동기들의 외박은 당연히 금지된다. 몇 번을 쓰러졌다 뛰었다 하며 결국 완주는 했지만 내 덕(?)에 우리 소대원들은 당연히 전원 외박이 금지되었고, 밤늦게까지 연병장을 구보를 해야 했다. 물론 나는 수십 대의 빠따를 맞고 엉덩이가 뭉그러진 채 자리에 누워 끙끙 앓았다.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것이 편했을 정도로 소중한 자존심이 한없이 추락하는 참혹한 심정으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이 모든 것이 집사람이 여름에 보내준 곰팡이가 가득 핀 돈가스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런 후 돈가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지금도 다른 사람들과 늘 나눠 먹는다.


그러한 경험이 있은 후에 학교에 재직하고 있을 때, 당뇨로 고생하는 나에게 동료교수가 마라톤을 권하여 기억하고 싶지 않은 마라톤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2km도 힘들었지만 점차로 실력이 늘어서 10km는 물론 하프(21km)도 뛰고 결국 풀코스(42.195km)도 여러 번 뛰게 되었다.


급기야는 퇴임을 앞두고서 퇴임 기념으로 퇴임 전에 책을 출판하고, 울트라 마라톤(100km)도 뛰겠다는 두 가지 약속을 학생들에게 했었다. 그런 다음에 책을 쓰느라고 몇 달간 무리하게 늦게까지 연구실에 앉아 있었던 후유증으로 갑작스럽게 목 디스크가 생겨서 학생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어렵게 되었다. 제자들은 이런 나의 처지를 눈치 채고 퇴임 전 해인 2009년 가을에 나도 모르게 학생들 50명이 함께 2km를 달려서 합계 100km를 달리는 학교 행사를 개최하여 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유별난 교수와 제자라는 내용으로 언론에도 소개가 되어서 화제가 된 일도 있었다.


그런 다음에 나는 다행스럽게도 디스크를 극복하고 학생과의 약속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책도 계획했던 대로 출판할 수 있게 되었고, 울트라 마라톤에도 도전하여 결국 100Km 울트라 마라톤도 완주하게 되었다. 8회 광주 빛고을 울트라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다. 2010613일 저녁 6시에 광주시청 야외공원을 출발하여 첨단 공원, 5.18 국립묘지, 남면 초등학교, 전남 교육연수원, 무등산 유둔재, 화순 구산리, 안양산, 수만리, 화순읍, 너릿재, 광주천, 광주 시청 야외공원까지 100km를 무박 2일로 달렸다. 중간에 간단한 야식을 한 번 받아먹을 수 있었고, 제한 시간 15시간 이내에 들어와야 기록이 인정된다. 나는 제한 시간 20분을 남겨 놓고 함께 달린 동료들과 함께 14시간 40분을 달려 다음 날인 14일 오전 840분에 골인하여 제자들과의 약속을 지켰다.


이 대회 준비를 위해서 몇 년에 걸친 여러 가지 힘든 장기적 훈련이 있었지만 20075월에는 지리산 중산리에서 천왕봉, 장터목, 벽소령, 노고단까지 34km14시간에 뛰어서 종주했던 힘겨웠던 지리산 지옥 훈련도 생각난다. 이 훈련을 기획하고 우리를 이끌었던 광양에 사는 김홍기 총무에게도 진심으로 감사하며, 그 때 함께 동반주를 했던 광주에 살고 있는 이동행, 박원철, 김양식, 김홍기, 홍영배 등 5명의 친구들이 새삼 그리워진다.


나는 그간 100여 회의 크고 작은 대회에 참가하며 마라톤을 즐기게 되었으나, 20182월 뇌경색으로 쓰러진 이후 마라톤을 접고 서울로 이사를 해야 했다. 그간 달리면서 받았던 완주 메달을 벽에 걸어 놓고 활기 왕성했던 옛 추억만 회상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함께 마라톤을 즐기던 친구가 백양사 인근에 있는 한재골(해발 390m)에서 눈보라를 맞아가며 연습을 하던 사진(201312)을 카톡에 올려 보내 주었다. 건강했던 옛 모습을 한번 회상하며 옛 추억에 젖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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