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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06-15 23:00:36
  • 수정 2022-06-25 12: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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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인 수녀가 병상에서 어머니를 그리며 쓴 책 ˝엄마` 표지


한 해가 마무리 되고 새로운 달력을 받을 때 쯤 되면 언제나 어머니 생각에 가슴이 아려온다. 특히 금년이 돌아가신 지 20주년이 되고 보니 더욱 그런 마음 주체할 수 없다. 내 어머니는 우리 가문의 자손 번식용 씨받이로 시집을 오신 것 같다. 어머님 세대에는 흔했던 모양인데 우리 집 5대 독자인 아버님을 위해 할머니께서 어머니를 특별 간택을 하신 모양이다. 할머니의 며느리 선발 기준으로 가장 중요한 조건은 자손이 아주 번성한 집안의 규수이어야 했다. 할머니의 집안 경제력은 좀 넉넉한 편이었기 때문에 사돈될 사람들의 집안 사정이나 경제상황은 고려되지 않았다. 그래서 집에서 좀 떨어진 전기불도 구경하지 못한 오지 벽촌에서 며느리 감으로 간택되었다 한다.


13세 아버님과 17세 어머님이 이렇게 부부의 연을 맺고 사시게 되었다. 손주를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서 나이가 좀 있는 연상의 여인이 간택되었다 한다. 그리고 어머님은 할머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5남매 3형제를 낳으셨다. 집안의 씨받이 남자를 셋이나 낳아서 이 집안의 대를 잇게 했다며 자신감과 뿌듯함으로 살아오신 어머님의 자랑을 나는 어려서부터 들어왔다. 그리고는 한 평생 자식 잘 되기만을 축원하며 온갖 힘든 시집살이와 고생스러운 삶을 사시다가 저 세상으로 떠나셨다.


할아버님은 아버님이 7살 되던 해에 돌아가셔서 아버님은 청상과부가 된 할머니 치마폭에서 아주 귀하게 사셨다는 옛 이야기만 들었을 뿐이어서 나는 할아버님은 전혀 접해본 적이 없고, 다만 몸집이 좀 우람하고 키가 큰 할머님이 나를 업어주면 할머니 목소리가 내 귀에 쩌렁 쩌렁 울렸던 기억만 난다. 젊은 과부로 가정을 지키며 살아가야 했던 할머니는 그래서 조금은 남성다웠던 모양이다.

조금은 남성스러운 청상과부로 살면서 애지중지 당신의 치마폭에서 키웠던 13살짜리 아들을 세상살이조차 잘 모르는 17살 며느리에게 맡기기에는 너무나 큰 분리불안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버님 역시 할머니 품에서 떠나 어머니를 찾기에는 너무 어렸고 마찬가지로 어머니에 대한 분리불안이 할머니처럼 컸을 것이다. 많은 시집살이가 예상되는 환경이었다. 내가 자라면서 어머니에게 조금씩 들었던 시집살이 이야기 중에서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으로만 드라마를 써도 아마 수십 편의 장편 드라마가 될 분량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하고 몸 단장 깨끗하게 하고 할머님께 아침 인사를 올려야 했다. 그리고 할머니가 내어준 쌀바가지를 들고 아침을 준비해서 늘 할머니와 아버님에게 겸상을 차려드렸다 한다. 어머님이 아버님과 겸상을 할 수 있는 기회는 할머니가 그때는 망령이라고 불렀던 증상이 좀 심했던 치매 증상으로 돌아가신 이후부터 가능했다는 한 섞인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아마도 알츠하이머 증상이 함께 나타나는 좀 심한 치매를 앓으셨던 것 같다.


지금도 기억되는 한 많은 어머니의 시집살이 몇 가지를 기록해 보려 한다. 어머님이 어려서 시집을 오시고 좀 놀라신 것은 아버님 집의 여유로운 경제생활이었다고 한다. 가을 추수가 끝나고 소작인들이 가을걷이 쌀을 마차로 실어올 때 마차의 끝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어머님의 기억이 좀 과장일지는 모르겠지만 먹고 사는 생활은 넉넉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할머니는 언제나 쌀 뒤주에서 먹을 만큼만 바가지로 퍼내주고는 열쇠로 쌀 뒤주를 잠가 놓았다고 한다. 하루 세끼 아버님과의 겸상을 차려 드리고 어머니는 늘 부엌 부뚜막에서 혼자 드셨다고 한다.


저녁을 먹고 밤이 어두워지면 할머니와 아버님이 함께 주무실 이부자리 살펴드리고 어머니는 다른 방에서 혼자 독수공방으로 세월을 보내셨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우리 5남매를 낳을 수 있었느냐는 나의 짓궂은 질문에 아버님이 그때그때 할머니 방에서 야밤 탈출을 한 결과라며 빙그레 웃으셨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그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아버지와는 견우와 직녀가 만나듯이 가물에 콩 나듯 합방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내 자식들은 모두 머리가 영리할 것이라 믿으셨.


간혹 아버님의 철부지 도령 행실에 시집살이를 더 키운 일도 있었는데 부엌에서 실수로 밥을 잘 못하여 누룽지가 많이 생기면 그걸 할머니에게 고자질하여 어머니를 더욱 난처하게 만든 일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할머니는 가을 추수가 끝나면 동네 친구 분 몇 명과 함께 만주들판과 목단강 같은 먼 곳으로 한두 달씩 여행을 다니셨다고 한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할머니가 돌아올 때까지 필요한 쌀만 내어 놓고 쌀 뒤주는 꼭 잠가 놓았고, 더욱 심한 것은 집을 비운 기간 동안 어머니를 감시하는 파수꾼을 두고 여행을 떠났다고 하니 어머니의 신분은 그저 집안 살림을 돕는 하인이나 노예 정도의 신분이었던 것 같다.


어머니의 시집살이는 고향에서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정도로 소문이 파다했던 모양이다. 내가 어렸던 시절 어머니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던 순간이 몇 번 있었다며 그 속사정을 털어 놓은 적이 있었다. 고향에는 제법 큰 저수지가 있는 데 하도 시집살이가 심해서 그 곳에서 여러 번 나쁜 생각을 했었다는 과거의 힘들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한창 자라는 자식들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 못했는데 그래도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아서 너희 자식들 보며 사니까 행복하다는 말씀을 하시는 말을 듣고 내가 얼른 커서 어머니에게 효도 많이 해야겠다는 마음 다짐을 하곤 했다.


어머님의 자식 사랑은 대단하셨다. 겉으로는 전혀 내보이지 않고 속으로만 실행하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머님은 맹모 이상으로 자식 교육열이 남달랐던 것으로 기억된다. 해방 이후 토지개혁으로 대부분의 토지를 잃고 아버님은 지금의 담배인삼공사인 전매청에 다니셨고, 어머니는 살림집에 딸린 가게에서 잡화점을 차리며 넉넉지 못한 생활을 도우셨지만, 자식들에게 교육을 잘 시켜야 한다며 국민학교를 졸업시키고는 바로 서울로 유학을 보냈다.


중학교 시절 방학 때 집에 오면 객지에서 고생했다며 가마솥에 곰국을 한 솥을 끓여 일주일 동안 세끼를 다 먹였고, 참외 등 과일도 접으로 사서 마음껏 먹도록 했다. 나는 곰국 먹기에 질려 집 밖으로 도망을 가면 부엌에서 곰국을 데우던 지팡이를 들고 쫓아다니며 억지로 나에게 곰국을 먹였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렇게 일주일을 곰국과 과일을 실컷 먹이고는 냉정하게 바로 서울로 올라가서 공부 열심히 하라며 서울로 내쫓던 기억도 생생하다.


그런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어머니는 정말 진정한 치맛바람을 실천한 맹모와도 같은 여장부였다. 좀 커서 그때 왜 그렇게 엄하게 키웠냐고 물었더니 어머니는 모든 것 다 자식을 위한 일이었으며, 어린 자식을 버스에 태워 서울로 보내고는 집에 와서 참 많은 눈물을 흘렸다는 과거 이야기를 들려주시면 열심히 공부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어 어머님의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다짐을 하곤 했다. 지금껏 열심히 살아 온 내 인생을 생각해 보니 지금의 나의 모습은 전적으로 어머님의 헌신과 강한 교육열의 결과였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님의 은덕에 늘 감사할 따름이다. 어머님은 늘 아들자식을 두어 집안의 대를 잇겠다는 결심과 자식을 힘닿는 만큼 최선을 다해 교육을 시키겠다는 강한 교육열로 다져진 분이시다.


내가 결혼을 하여 며느리를 보게 된 어머니는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해 주셨다. 마누라를 꼭 잡고 남자로서의 긍지를 지키고 살라면서 어머니 자신은 며느리에게 절대로 시집살이를 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셨다. 나는 농담으로 시집살이 해본 사람이 더 시집살이를 시킨다고 했더니, 어머니는 시집살이를 대충 맛만 본 사람은 그럴지 몰라도 정말 지독한 진짜 시집살이를 제대로 해본 사람은 며느리의 심정을 진심으로 헤아릴 수 있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못한다는 말씀이셨다. 어머니는 정말 약속해 주신 말씀대로 며느리와 진정으로 가깝게 지내셨다. 그렇지만 어머니 판단에 잘못이라고 생각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한 말씀으로 며느리를 설득시키려는 방법은 숨기지 않으셨다.


어머니의 손자에 대한 애틋한 사랑은 남달랐다. 나는 우연히도 아들만 둘을 낳았다. 어머니의 그 기쁨은 겉으로 나타내지 않았지만 부모님을 뵈러 고향 집으로 내려갔던 어느 날 집사람에게 네 뱃속에는 어떻게 아들만 들어 있느냐며 집사람을 추켜 세워주었다고 한다. 후에 집사람에게 들은 말인 데 어느 여름 날 두 손자를 데리고 며느리를 앞장세워 어머니의 친정 집을 간 적이 있단다. 외가댁은 시외버스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달리고 다시 시골 길 20여 리를 걸어가야 하는 벽촌이다. 그렇게 힘든 길을 애써서 간 이유를 나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외갓집 친척들에게 대학을 나온 며느리와 두 손자를 자랑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처럼 자상하시고 헌신적으로 내리 사랑만 베풀던 어머님에게 마음껏 효도해 본 기억이 별로 없다. 사회에서 자리를 잡고 철이 들 만하니 어머니는 이 세상을 떠나시고 지금은 내 앞에 계시지 않는다. 나는 지금도 어머님이 돌아가시던 날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지방에서 교환교수 신분으로 서울의 모교로 1년간 자리를 옮긴 1989년의 일이다. 나는 학교 부근에서의 생활을 마다하고 고향 이천에서 서울로 매일 출퇴근을 하면서 자리에 누워계신 어머니를 보살펴드렸다. 그 때 서울 학교까지 출근하려면 2시간이나 걸렸다. 왕복 4시간을 출퇴근 하는 데 소비했지만 오히려 마음은 편했다. 나는 늘 어머니에게 주전부리로 부드러운 과일 통조림을 사 드리곤 했는데, 출근을 하는 어느 날 통조림을 머리맡에 놓고 나가라고 하셨다.

그런데 나는 저녁에 와서 따 드리겠다고 하고 그냥 출근을 했는데, 퇴근 후에 통조림을 드릴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집에 도착하기 바로 직전에 저 세상으로 떠나셨다. 아직 어머님의 식지 않은 온기를 내 손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한 많은 여자로서의 일생을 마감하고, 위대한 어머니로 기억되는 새 역사를 쓰는 순간이었다.


나는 얼마 전 건강치 못한 집사람을 대동하고 고향 집에서 홀로 사시는 새 어머님 보양 점심을 대접해 드리고 지갑에 용돈도 조금 넣어드리고 왔다. 아마도 돌아가신 어머니도 나의 밉지 않은 행동에 빙그레 웃음을 지으셨을 것이다. 오늘 따라 유난히 어머니의 따뜻한 품에 안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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