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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06-03 18:01:17
  • 수정 2022-06-25 12: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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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속의 슬픈 사연을 품고 흐르는 홍제천 상류 [사진 출처 =봉지[


홍제천은 내가 하루에 몇 차례 산책하는 유일한 산책로다. 지하철 홍제역(2번 출구)에서 무악재역 방향으로 홍제원 현대 아파트가 있는데, 이 일대가 우리나라 첫 국립여관 홍제원의 옛터라 한다. 이곳은 예전에 개성이나 평양으로 가는 제1국도로 교통과 통신의 중요 관문이었다고 한다.

홍제원은 985년 고려 성종(成宗) 4년에 정현(鼎賢)스님이 창건한 최초의 국립 여관으로, 본래 이름은 홍제원(洪済院)이었는데, 조선시대 세종 이후부터 빈민구제의 역할도 하게 되어 널리 구한다는 뜻으로 홍제(弘済)라는 이름도 함께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홍제원은 도성 부근 4개의 원() 가운데 하나였는데, 다른 원보다 규모가 컸다고 한다. 여관이라는 고유의 역할 이외에도 아픈 사람을 치료하고 약을 제공하는 장소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특히 중국 사신이 무악재를 넘어 영은문(迎恩門)을 거쳐 도성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휴식을 취하며 예복을 갈아입던 곳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역할을 하였던 홍제원은 청일전쟁(1894) 때까지도 남아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매년 4~5차례 중국에 사신을 보냈는데, 사신단에 속한 관졸과 가마꾼 등을 합치면 100여 명에 달해 중국으로 떠나는 사신 일행에 대한 환송식이 열리면 이곳 홍제원 일대는 떠나는 사람과 전송하는 사람들로 요란한 술자리가 벌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홍제원 일대는 여인들과 어울려 술잔을 비우던 색주가(色酒家)도 많아 크게 번창하였다.


이렇게 번창하던 홍제천 지역은 1636(인조 14)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병자호란(丙子胡乱)을 겪으면서 씻지 못할 슬픈 역사를 기록하게 된다. 후금(後金)을 세운 누르하치(如兒哈赤)의 여덟 번째 아들인 태종(太宗)은 명()을 정벌하여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1627년에 이어 두 번째로 10만 대군을 이끌고 심양(瀋陽)을 떠나 압록강을 거쳐 단 5일 만에 수도 개성(開城)까지 침공해왔다. 인조는 강화로의 피신이 여의치 않아 남한산성으로 거처를 옮기지만 45일 만에 항복을 하고,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이마를 땅에 닿을 듯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치욕을 당하게 된다.


영의정이었던 최명길(崔鳴吉)지천집(遲川集)”에 의하면 청()태종(太宗)이 한강을 건널 때 조선의 소현세자를 비롯한 여성 50만 명이 끌려갔으며, 공조참의(工曹参議)를 지냈던 나만갑(羅萬甲)60만 명이나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50~60만 명이라는 숫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끌려간 사람의 수가 엄청났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만주 벌판을 지나 청()의 수도 봉천(奉天 : 만주어 Mukden), 지금의 심양(沈阳)까지 2,600리 길을 70일 넘게 걸어야 하는 힘든 고행의 길이었으며, 보석금에 해당하는 속환금(贖還金)을 지불하지 못하면 노예 시장에서 팔려 나가기도 했다. 당시 속가(贖價)는 싼 경우 1인당 30냥 정도였고, 대개는 200냥 정도였고, 신분이 높은 경우는 1,500냥으로 비싼 편이었다. 당시 만주에는 담배가 귀해서 조선에 비해 수십 배나 비싸서 담배 한 짐이면 몇 명의 속환금을 지불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신계영(辛啓榮)이 병자호란이 일어난 이듬해인 1637년에 속환사(贖還使)로 청에 파견되어 포로 600여 명을 귀환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청에 인질로 끌려간 대부분의 부녀자들은 돌아오기 힘들었지만 개중에 많은 돈을 주고 돌아와도 집안에서 이들을 환영하지 않았다. 오히려 환향녀(還郷女)들은 정절을 잃었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공개적으로 이혼 청구를 당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당시는 남자들의 이혼 청구가 있어도 임금의 허락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청국(清國)에서 절개를 짓밟히고 돌아와도 그들의 남편들은 집단적으로 왕에게 이혼을 청구하는 사례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선조는 이혼을 요청한 상황은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으나 절개를 잃은 것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허락할 수 없다고 이혼 청구를 거절했다. 당시 조선법에는 삼불거(三不去)라고 해서 여자들이 아무리 칠거지악(七去之悪)의 죄를 저질러도 이혼할 수 없는 세 가지 경우가 있었다. 첫째는 시부모를 위해 삼년상을 치른 경우, 둘째는 혼인 당시 남편이 가난하고 천한 지위에 있었으나 후에 부귀를 얻은 경우, 셋째는 이혼한 뒤에 돌아갈 만한 친정이 없는 경우다.


이처럼 환향녀들에 대한 문제가 사회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키자 조정에서는 궁여지책으로 홍제천에서 몸을 씻으면 모든 것을 씻은 새로운 사람으로 인정한다는 방편을 내놓았다. 즉 환향녀가 속옷 차림으로 홍제천 물을 건너게 되면 청에서 당한 더러움을 깨끗이 씻은 것으로 간주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렇게 홍제천에 들어가서 몸을 씻은 여자들에게는 정조를 되찾은 것으로 간주한다는 뜻으로 회절여인(回節女人)”이라 부르고, 이러한 절차를 거쳐 회절한 환향녀를 거부하는 집안은 중벌을 내리겠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이런 방편을 사회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정조를 잃은 그들에게 환향녀(還郷女)”, 혹은 심한 경우 환향년이라고 비하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회적 분위기가 되었다. 간혹 이들 중에 아이를 낳은 경우, 오랑캐의 포로로 끌려갔다가 낳은 자식이라는 뜻으로 호로(胡虜)새끼, 또는 호래(후레)자식(胡來子息)이라며 멸시했다. ()에 아부하는 관료들도 호로새끼라고 비하했다고 한다. 어쨌든 이들은 이 같은 천시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청으로 되돌아가거나, 홍제천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고, 일부는 목구멍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홍제천 주변에서 주막을 차리거나 보리쌀 한 됫박에 몸을 팔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지역에 떡집(특히 인절미)과 순댓국집이 많은 것은 조선시대에 중국으로 떠나는 사신들을 환송하던 장소였고, 중국에서 온 사신들이 무악재를 넘어 성 안으로 들어가기 전의 마지막 쉼터였다는 역사적 사실들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 지역이 재정비되기 전까지 선술집과 윤락가들이 많았었다는 이유가 병자호란에 이은 환향녀 사건과 관련이 있었음을 이해하게 되니 마음 한구석을 도려내는 허망한 아픔과 슬픔이 엄습해 옴을 어찌할 수가 없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보다도 더 컸던 정치사회적 문제가 이곳 홍제천과 함께 역사 속에 묻혀 있는 것이다.


홍제동은 현대화를 겪으면서 홍제원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홍제내리에 속했다가, 광복 후 홍제동으로 바뀌었다. 홍은동(弘恩洞)이라는 지명은 임금이 이곳 홍제천에서 환향녀들에게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크나 큰 은혜를 베풀었다는 뜻에서 홍은동이라 부른다는 말도 있으나,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홍제외리의 ()”자와 은평면의 ()”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후에 서울의 행정구역 확대 정책(1949)에 의거 서대문구 홍제외리가 다시 서울시 조례 1185(1950)에 의거 홍제천 북쪽을 홍은동, 남쪽을 홍제동으로 개편하게 되었.


홍제천은 북한산 수문봉, 보현봉, 형제봉, 평창동에서 발원하여 종로구와 서대문구를 관통하여 마포구 국가 하천인 한강 우측으로 흐르는 지방 2급 하천이다. 홍제천은 모래가 많아 예로부터 모래내(沙川)라 불리기도 한다. 이 하천은 기본 정비계획에 따라 1999년에 약 18km의 홍제천으로 정비되었고, 2008년부터는 평소 말라 있던 홍제천에 물이 흐르도록 복원했다. 한강에서 하루 43,000톤의 물을 끌어와 홍지문에서 1t, 유진상가 상류에서 25500t, 구청 앞 백련교 하류에서 7,500t의 물을 흘려보내는 식으로 정비되었다. 2021년에는 375천만 원을 투자하여 홍제천 상류지역인 평창동에서 종로구의 경계점인 홍지문까지 약 3km 구간에 산책로 홍제락(弘済樂) 을 새롭게 조성할 계획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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