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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분석]시진핑이 왜 이럴까?, 마오쩌둥 말년 보면 이해된다! - 시진핑은 이미 마오쩌둥의 말기에 접어 들었다” - "마오를 롤 모델로 하는 시진핑, 나폴레옹 3세 같은 황당한 시대" - 중국에서 숙청 많은 것도 정변에 대한 불안 때문
  • 기사등록 2022-01-17 14:40:40
  • 수정 2022-01-18 08: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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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 문화대혁명 전문가 쑹융이와의 인터뷰]


지난해 12월 21일, 영국의 BBC 중문판은 “시진핑, 이미 마오 말기에 진입했다(習近平已經進入「毛晚期」)”는 제목으로 세계적인 중국문화대혁명 연구자인 쑹융이(宋永毅)와의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 지난해 12월 21일, 영국의 BBC 중문판은 “시진핑, 이미 마오 말기에 진입했다(習近平已經進入「毛晚期」)”는 제목으로 세계적인 중국문화대혁명 연구자인 쑹융이(宋永毅)와의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쑹융이(宋永毅)는 중국 문화대혁명에 관한 한 최고의 전문가라고 평가할 정도로 이 분야에 대한 연구에 평생을 바쳐왔다. 그가 문화대혁명과 관련해 펴낸 ‘중국문화대혁명데이터베이스(1966~1976)’는 1차 자료만 4만 여건 1억 2000만 자에 달할 정도로 어마어마하고도 방대하다. 그래서 중국 문화대혁명에 관해 제대로 알려면 쑹융이(宋永毅)의 자료집을 보면 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미국의 문혁 전문가 로드릭맥파커 하버드대 교수도 “이들 데이터베이스가 당대 중국 연구의 기초를 놓았다”고 평가할 정도다.


쑹융이(宋永毅)는 본래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두 달여 만인 1949년 12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철저한 공산주의자였다. 그래서 개국공신으로 상하이 초대 시장을 맡았던 천이(陳毅) 장군을 흠모해 아들에게 ‘영원한 이(毅)’라는 뜻의 이름 ‘융이(永毅)’하고 지어주었다. 집안이 이 정도니 쑹융이(宋永毅) 또한 어릴 적부터 마오쩌둥(毛澤東)과 공산당을 열과 성을 다해 호위하고 장차 미사일 설계사가 돼 조국에 이바지하겠다는 홍색(紅色) 기상이 넘쳐났다.


그런 그가 17살 때 문화대혁명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쑹융이(宋永毅)가 만난 문화대혁명은 자신이 숭배했던 공산주의 사상에 대해 완전한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특히 그는 홍위병 싸움에 말려들어 동창생에게 고발당한 뒤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때 나이가 20대 초반이었다.


그는 5년 반 가까이 캄캄한 지하에서 감옥생활을 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까지 했었고, 심지어 단식농성까지 했다고 한다.


쑹융이(宋永毅)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집안 출신은 좋지 않았지만 그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마오쩌둥과 공산당을 성심성의껏 옹호했다”고 했다.


그런데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면서 그의 생각과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그는 당시를 회고하며 “문화대혁명이 일어난 후 나타난 일련의 사회적 난맥상은 마오쩌둥이 일으킨 문화대혁명의 본질과 중국의 미래를 고민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그는 감옥에서 마오쩌둥 전집 4권과 마르크스-엥겔스 저작 4권, 레닌선집 1권 등 각종 서적을 보고 또 보며 문화대혁명과 마오쩌둥은 당시 신문에서 선전했던 것과는 본질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때부터 쑹융이(宋永毅)는 마오쩌둥과 문화대혁명의 실체와 본질을 파헤치겠다고 마음먹게 된다.


[마오쩌둥의 실체 3가지]


쑹융이(宋永毅)는 그 당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세 가지를 깨닫게 됐다고 한다.


첫째, 마오쩌둥은 항일전쟁때 정작 항일(抗日)은 하지 않고 공산당 역량 키우는 일만 하면서 국민당을 누르고 천하의 패권 잡는 일에만 열중했다는 점을 마오 선집에서 알 수 있게 되었다.


둘째, 마오쩌둥은 건설할 줄은 모르고 오직 파괴하는 일만 잘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마오의 호남운동 시찰 보고를 보면 그의 행적이 너무나도 잘 나타나 있는데 거길 보면 마오가 어떻게 사람을 속이고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셋째, 마오쩌둥은 서양세계나 과학은 모르고 오로지 권술(權術), 곧 권모술수에만 능한 허풍쟁이였다. 또한 마오의 행동은 모순이 너무나도 많았다.


[문화대혁명의 실체 수집한 쑹융이]


중국의 현실에 환멸을 느낀 쑹융이(宋永毅)는 1989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리고 그는 그때부터 중국의 문화대혁명에 관련된 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미국에 있는 문화대혁명 자료들이 오류가 너무 많았고 제대로 된 자료들이 그리 많지 않자 미국에서 자료를 모으는데 한계를 느낀 그는 1998년 여름 ‘장징궈국제학술교류재단(蔣經國國際學術交流基金)의 지원을 받아 스즈유(石之瑜)·궈젠(郭建)·딩서(丁抒)·저우위안(周原)·저우쩌하오(周澤浩)·선즈자(沈志佳) 등 학자들과 함께 자료 수집차 중국에 들어간다.


특히 그가 중국에 들어가서 수집하려 했던 자료들은 중국 공산당이 은폐한 것들이나 조작되고 위조된 자료들이 아닌 실체적 진실을 찾아내려 했다. 그러나 문혁 당시 광시(廣西)지구에서 사람을 잡아먹는 풍조까지 파헤친 자료 수집이 순조로울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그 와중에 그는 간첩죄로 체포된다.


그러자 100여 명의 미국과 유럽의 학자가 후진타오(胡錦濤) 당시 국가부주석에게 편지를 보내 그의 석방을 탄원한다. 그는 결국 중국에 붙들린 지 반년만인 2000년 초 미국으로 돌아오게 되고 그후 국적도 중국에서 미국으로 바뀌게 된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문화대혁명의 실체 자료들을 데이터베이스화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하여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방대한 문화대혁명 자료들이 정리되게 된 것이다. 그가 펴낸 데이터베이스는 크게 5개다. ’문화대혁명 데이터베이스(1966~1976)‘, ’중국 반우(反右)운동 데이터베이스‘, ’중국 대약진-대기근 데이터베이스‘, ’중국 50년대 초중반 정치운동 그리고 토지개혁부터 공사합영까지(1949~1956)‘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 수록된 자료들 가운데는 극비문서들도 포함되어 있어 흥미를 끈다. 또한 2700여종의 홍위병 타블로이드신문들도 모여 있고 희귀한 정치운동 개인 자료들까지 망라되어 있어 중국 건국 초기 자료의 보고(寶庫)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쑹융이가 분석한 마오쩌둥의 실체]


쑹융이(宋永毅)는 한마디로 “마오쩌둥이 없었다면 문화대혁명도 없었을 것”이라 단언한다. 물론 공산당과 독재라는 정치제제는 존재했겠지만 류사오치 등 괜찮은 정치인들도 있었기 때문에 마오쩌둥과 같은 정치를 하지는 않을 것이란 의미다.


그러면서 쑹융이(宋永毅)는 “문화대혁명에서 마오쩌둥의 변태적 인격이나 비이성적 판단을 찾아볼 수 있다”면서 “문화대혁명을 연구해 보면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의 민낯, 곧 부풀려진 개인적인 야망과 비열한 이기적 욕망을 찾아 볼 수 있다”고 했다.


실제로 마오쩌둥은 자신의 승인을 받아 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불리해지면 오히려 그 정책시행자들을 비난하고 숙청하는 일도 있었다. 결국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게 된 것도 마오쩌둥의 편집적인 인격으로부터 기인된 것이고 비이성적인 정신상태가 그러한 비극을 만들어 낸 것”이라 쑹융이(宋永毅)는 진단했다.


심지어 마오쩌둥은 그의 부하들조차 믿지 못했다. 이러한 성향은 말년에 접어들면서 더욱 심해졌다. 그러다보니 충복이라 할 수 있는 펑전(彭眞)에서 양상쿤(楊尙昆)까지 모두를 의심했다고 한다.


사실 당시의 당내 인사 중 정변을 생각하거나 마오쩌둥에 반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의심은 계속되었고, 이러한 두려움 때문에 극심한 공포감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해외에 감히 나가지 못하고 비행기도 타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성격도 변덕이 심해 ’이랬다 저랬다‘를 반복하는 경우가 많았고, 누구도 믿지 않은 그러한 성격이 문화대혁명을 광적으로 만들었고 나중에는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의 파탄상태로 만들게 되었다.


특히 쑹융이(宋永毅)는 “마오쩌둥의 문란한 사생활이 문화대혁명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지역을 오가는 열차안에서도 문란한 행동들이 있었고, 이러한 마오쩌둥의 행각들이 소문이 나면 누군가가 자신을 도청했다며 부하들을 질책하고 숙청까지 하기도 했다.


[시진핑에게서 나타나는 마오쩌둥의 노년]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마오쩌둥의 말년시기에 나타난 병적인 행동들이 시진핑 주석에게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쑹융이(宋永毅)는 한마디로 “시진핑은 이미 마오쩌둥의 말기에 접어 들었다”고 진단했다. 정치심리적인 분석에 근거해서다.


사실 시진핑 주석이 2012년 가을, 중국 공산당 총서기에 오를 때만 해도 중국내에서는 상당한 기대감이 있었다. 그러한 기대감은 아버지 시중쉰(習仲勳) 때문이었다. 시중쉰(習仲勳) 전 국무원 부총리는 문화대혁명 시기에 마오쩌둥으로부터 숙청을 당했고, 시진핑 또한 이에 연루돼 산시(陝西) 농촌으로 추방당한 경험이 있어 마오쩌둥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중국을 보다 민주화된 길로 이끌 것이란 낙관적인 기대감이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시중쉰(習仲勳)은 당내에서도 덩샤오핑과 같은 개명파(開明派)여서 시진핑 역시 부전자전으로 중국의 개혁개방을 한층 심화시킬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집권 1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의 시진핑은 이러한 기대를 완전히 허물어 버렸다. 그의 강권통치는 마오쩌둥의 그림자를 보게 하고 있고 대외적으로도 중국의 전랑외교는 국제질서에 충격을 주면서 광범위한 우려를 주고 있다는 것이 쑹융이(宋永毅)의 평가다.


쑹융이(宋永毅)는 이어 “중국내에서 문화대혁명에 대한 연구는 이미 사라졌다”면서 “반면 마오쩌둥 당시의 문화대혁명이 시진핑 시기의 정치운동으로 이미 절정을 이루고 있다”고 비판했다.


쑹융이(宋永毅)는 “지난해 11월 8일부터 있었던 ’중국공산당 제19기 중앙위원회 제6차 전체회의‘(6중전회)에서의 세 번째 역사결의를 한 이유도 시진핑의 정치 심리를 보면 그 배경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했다.


마오쩌둥이 문화대혁명을 일으켰을 때 나이가 73세였는데 시진핑의 역사결의 추진 때의 당시 나이는 68세였다. 물론 시진핑이 마오에 비해 나이가 5살 어리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의 육체적 건강이 마오보다 낫다고 할 수는 없다. 문혁 당시 73였던 마오는 여전히 장강(長江)에서 수영을 할 정도로 건강을 과시했지만 시진핑은 3년 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방문 시 넘어질 뻔한 일이 발생할 정도로 신체적인 면에서 마오보다 결코 나은 상황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지금의 시진핑에게서 말년의 마오쩌둥 모습이 보인다고 말하는 것은 그의 정신상태 때문이다. 마오는 말년에 아무도 믿지 못하였다. 심지어 충복들조차 의심했다. 그래서 정변이 일어날 것을 염려했고, 그런 연고로 비행기도 타지 않았던 것이다. 누군가 자신을 암살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마오의 말년에는 끊임없는 숙청들이 단행됐다.


그런데 쑹융이(宋永毅)는 “시진핑이 추진한 역사결의의 배경에 대해 중국 인터넷 공간에서 두 가지 이야기가 돌고 있다”면서 “하나는 시진핑의 권력 공고화를 위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내부 군사정변을 예방하기 위해서”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쑹융이(宋永毅)는 “한때 시진핑의 심복으로 ‘시진핑의 칼’로 불리던 푸정화(傅政華) 전 사법부장과 쑨리쥔(孫力軍) 전 공안부 부부장 등이 지난해 낙마한 것도 알고보면 칼을 든 이들이 반기를 들 것을 두려워서였다”고 정리했다.


특히 “마오쩌둥이 숙청한 사람들은 상당수가 자기 사람이었는데 지금 시진핑에게서 바로 그 모습이 보인다”고 했다. 쑹융이(宋永毅)는 “이러한 말들이 나오는 것에 대해 터무니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정작 시진핑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쑹융이(宋永毅)는 그러면서 “독재자의 심리는 비슷한데 시진핑의 지금 정치적 심리상태가 마오의 말년과 유사해 두려움에 떨며 바깥출입도 제대로 못 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아마도 시진핑 주석이 2020년 1월 미얀마를 방문한 이후 2년 넘도록 비행기를 타고 해외에 나가지 못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일 것이다. 이러한 행동에 대해 쑹융이(宋永毅)는 “독재자가 공통으로 갖는 의심과 공포 때문”이라 했다.


쑹융이(宋永毅)는 “중국에서 끊임없이 숙청이 진행되는 것도 하루에 한 명이라도 숙청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쑹융이(宋永毅)는 시진핑을 나폴레옹 3세에 비유했다. 나폴레옹 1세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는 삼촌을 모방해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다시 황제에 올랐지만 곧바로 폐위 당한다.


이 사건에 대해 1852년 마르크스는 헤겔을 평가하면서 “헤겔은 ‘위대한 세계의 모든 역사적 사건과 인물은 꼭 두 번씩 출현한다고 말했는데 헤겔이 까먹고 말하지 않은 게 있다. 그건 ‘하나가 정통 드라마라면 다른 하나는 황당 드라마’라는 것”이라 했다.


그런데 쑹융이(宋永毅)가 보기에는 “마오 시대가 정통이라면 마오를 롤 모델로 하는 시진핑 시대는 마치 나폴레옹 3세와 같은 그저 황당한 시대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과연 시진핑의 말기는 어떻게 진전될지 관심거리다. 중국은 과연 다시 어둠의 시대로 돌입하게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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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푸단대학교 한국연구원 객좌교수
    -전 EDUIN News 대표
    -전 OUR NEWS 대표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정책기획팀장
    -전 대통령실 홍보기획비서관
    -사단법인 한국가정상담연구소 이사장

    -저서: 북한급변사태와 한반도통일, 2012 다시우파다, 선거마케팅, 한국의 정치광고, 국회의원 선거매뉴얼 등 50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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